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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를 금하노라!

밖에 나가면 편히 눈 둘 데가 없다. 길을 걷다 보면 시선이 닿는 곳마다 수많은 금지 문구가 눈을 찔러댄다.하지 마라, 금지한다. 온통 금지 투성이다. 심지어 산 정상에 올라도 눈앞에 펼쳐진 경치보다 붉은 글씨로 쓰인 금지 사항들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접근 금지, 야호 소리 지르기 금지, 쓰레기 투기 금지, 이런 금지 저런 금지... 30여 년 독일에서 살다가 한국으로 '인천상륙작전'을 무사히 마친 첫해만 해도, 이래저래 금한다는 말들은 들기름 좀 챙겨가라는 엄마의 잔소리 정도로 여겼다. 지하철 계단마다 촘촘히 붙어 있는 우측통행 문구나 붐비는 환승 구역의 자리 이동에 대한 안내문도 출퇴근 혼잡을 피하기 위한 안전조치려니 했다. 하지만 목적지에 닿을 때까지 반복되는 안내 방송을 견디는 일은 고역이었다...

그리고 후반전 2026.05.07

최고의 인생

"헛되고 헛되다."솔로몬은 이 말을 전도서에서 무한 반복한다.도대체 뭐가 그렇게 헛되다는 걸까? 그는 전도서에 자신의 업적을 조목조목 나열한다. 하지만 잔뜩 부풀려놓은 풍선에 쉬익~ 바람 빠지듯, 모든 업적과 성취가 헛되다고 한다. 지혜를 얻으려고 애썼고, 누구보다도 지혜롭던 솔로몬은 지혜가 많으면 번뇌가 많고, 아는 게 많으면 근심이 많다며 김 빠지는 소리를 한다. 지혜도, 업적도 다 헛되단다.모든 것이 헛된 나머지 "자, 너 스스로 낙을 누리고 즐겁게 살아봐" (전도서 2:1) 라고 했지만, 이조차 어리석고 헛되다 한다. 주야장천 헛되다며 읊조리던 그가 전도서 3장 후반부에 이런 말을 한다."이제 나는 깨닫는다. 기쁘게 사는 것, 살면서 좋은 일을 하는 것, 사람에게 이보다 더 좋은 것이 무엇이랴" ..

그리고 후반전 2024.07.15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다

웹 디자이너 과정을 마치고 다음 단계로 Web Developer 수업을 들었다. 6주 동안 JavaScript, NodeJS 서버 구축, 그리고 ReactJS와 VueJS을 사용해 Single Page Application을 제작하는 것을 배웠다. 6주 강의를 듣고 2주 동안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프로젝트로 수제 도자기를 파는 온라인 쇼핑몰을 만들었다. 웹사이트 테스트 마쳤고, 내가 만든 NodeJS 서버와 연동돼서 잘 작동한다. 이 온라인 쇼핑몰은 올 가을에 귀국해서 언니와 함께 놀 놀이터다. 영업 전이라 현재 서버는 꺼놓은 상태다. 그래서 웹페이지는 볼 수 없다. 이 놀이터에서 언니는 도자기를 굽고, 나는 쇼핑몰을 제작 관리하며 판매하려 한다. 서로 좋아하는 것, 잘 하는 것을 하면서 수입까지 생기면..

하프타임 2023.04.08

개인 홈페이지를 만들다

역시 배움은 즐겁다.지난 12월부터 넉달 과정인 'Webdesign & Javascript developer' 수업에 등록해 웹사이트 만들고 관리하는 공부를 하고 있다. 나는 서버, 데이터베이스와 관련된 일을 하던 Backend-developer였다. 웹사이트 쪽은 생소해서 전문 과정에 등록해 제대로 배워보기로 했다. 이 공부를 시작하기 전 꽤 고민했다. 수십 년간 IT 기업에서 일하며 쌓아온 경력과 지식을 은퇴 후 개인의 영역으로 가져와 써먹으려니 체급이 맞지 않았다. 다운사이징 방편으로, 내가 읽은 책들을 관리해주는 도서 관리 시스템을 만들려다 관뒀다. 무료로 쓸 수 있는 훌륭한 앱이 넘쳐난다. 그거 쓰면 된다. '유투브에서 강의를 해볼까?' 흠... 이건 내 혀가 짧아서 가오가 안 선다. 이 ..

하프타임 2023.02.18

자동차 주문, 그리고 몇 가지 단상

엊그제 한국에서 탈 차를 주문했다.새 차 출고 기간이 1년 넘어가는 것들도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10만 원을 내고 덥석 주문을 넣었다. 지금으로부터 16개월 후, 2024년 2월에나 만날 수 있으니 차보다 내가 먼저 파주에 도착한다. 1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놀라 도나우 동네 자동차 판매점을 찾았다. 내가 주문한 차종은 독일에서도 8~10개월을 기다려야 한단다. BMW 전기차의 출고 기간은 18개월이란다. 글로벌하게 이게 대체 뭔 난리인지. 처음부터 새 차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중고차에 관해 묻자 한국에 있는 지인들 모두가 손을 내저었다. 토박이들이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새 차를 사기로 했다. 독일에서 30년째 사는 나는 국산 차를 잘 모른다. 지인들에게 물으니 현대 ..

하프타임 2022.11.25

나의 책 출판 이야기

처음부터 책을 내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니었다.퇴사 후, 지난 삶을 돌아보는 글을 올해 6개월간 '딱 좋아' 블로그에 비공개로 썼다. 짬짬이 찍어놓은 사진을 곁들여 30년 독일에서의 삶을 에피소드 중심으로 적어나갔다. 책 읽기의 어려움은 첫 장부터 읽으려는 성실한 마음가짐 때문이고, 글쓰기의 어려움은 시간순으로 (혹은 기초부터) 적으려는 치밀함 때문은 아닐까? 학술 논문도 아니고, 위인전을 쓰려는 것도 아니니 시간순 글쓰기라는 압박은 가뿐히 내려놓았다. 반년 동안 꽤 많은 글이 쌓여갔다. 그간 어지간히 할 말이 많았나 보다. 어느 날 쏟아놓은 이야기들을 혼자서 읽다가, 문득 '책으로 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써놓은 글들을 공개로 돌리지도 않으면서, 이 이야기들을 책으로 낸다고?'지극히 사적인 이야..

하프타임 2022.11.12

우리들의 놀이터

"우리, 놀이터 만들래?"양평에서 꽃 심고 그림 그리며 사는 언니의 전화다. 형제들이 모두 은퇴하면 같이 놀 공간을 만들어보자 한다. 언니가 말하는 놀이터는 사무실이나 방 한 칸 개념이 아니라, 집 딸린 땅이다. 땅을 사서 집을 짓기에는 건축자재값이 많이 올랐으니 큰 텃밭이 있는 시골집을 사서 우리들의 놀이 공간으로 개조해 놀자고 한다. 솔깃한 제안이다. 형제들이 놀이터에서 같이 놀 마음이 있다면, 형부의 정년퇴직 후 우리들 곁으로 이사 오겠단다. 부모님과 막냇동생네가 이미 살고 있고, 내년이면 우리 부부도 들어가 살 파주로 말이다. 우리들의 놀이터는 각자의 거주지에서 이동 거리 15~20분 정도의 파주 외곽에 있는 땅으로 좁혀진다. 이보다 멀면 매일 가서 놀고픈 마음이 사라질 수도 있다. 놀이터는 놀이..

그리고 후반전 2022.11.02

지금은 내 인생의 하프타임

프랑크푸르트 국제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30여 분 전부터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단번에 내 귀가 막힌다. 물을 마셔보고 입으로 크게 숨을 쉬어봐도 소용없다. 착륙이 임박하면 막힌 귀가 팽팽하게 아려온다. 은퇴도 마찬가지였다. 14개월의 준비 기간을 가졌지만 은퇴의 충격은 적지 않았다. 매달 통장에 찍히던 월급이 사라졌다. 이럴 줄 알고 대책을 세워놨지만 팽팽한 귀 막힘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딸, 너 이제는 실업자니까 용돈은 그만 보내."'아버지, 저 실업자 아니고 은퇴자예요!'아버지에게 은퇴자와 실업자는 동의어인가 보다. 내 건강보험 카드의 이름 앞에는 'Dr.'라고 쓰여있다. 독일에서는 박사학위를 한 사람의 신분증에 'Dr..

하프타임 2022.11.02

여전히 낯설다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고 있어도 도저히 적응 안 되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사우나다. 독일의 남녀혼탕 사우나에 대한 경험담을 적은 글들이 적잖지만, 내 경험은 최소 이불 킥 30년짜리다. 신혼 초에 살았던 마을의 옆 동네에는 야외 온천탕과 사우나를 갖춘 온천이 있었다. 눈 내리던 겨울에 남편과 함께 처음 그 온천에 갔다. 송이송이 눈 떨어지는 야외 온천만 즐기면 좋았을걸... 뜨겁고 건조한 공기로 땀을 뺀 후 야외에 설치된 얼음통에 몸을 담그면 환상적이라는 남편의 꼬드김에, 다 안 벗고 타월로 가리면 된다는 말에 나는 사우나를 해보기로 했다. 게다가 나는 고도 근시라서 안경 없이는 보이는 게 없다. 사우나 전용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식겁했다. 입구에서부터 독일식 뽕짝 가락이 요란하게 울려 ..

전반전 이야기 2022.06.27

오~ 오 서방!

엄마는 내 남편을 '오 서방'이라고 부르신다."잘 지냈는가, 오 서방~""오 서방, 언제 한국 올 텐가?" (장모님의 이 질문에 대한 오 서방의 대답은 늘 '내일'이다.)큰 사위는 강 서방, 막내 사위는 전 서방, 그리고 둘째 사위는 오 서방으로 일관성 있게 부르신다. 남편의 성이 '오' 씨 일리가 없다. 남편의 성은 올브리히(Olbrich)이다. 이 복잡한 발음에서 첫음절을 뚝 잘라내 엄마는 이국의 사위에게 오씨 성을 만들어 주셨다. 어느 날 남편에게 물었다."내 삶의 모토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겁게 살자!'야. 당신은?"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편이 "Happy wife, happy life!"를 외쳤다. 남편의 슬기로운 삶의 모토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 살짝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지기 싫어하는 ..

하프타임 2022.06.20

달걀과 바나나

남편은 달걀, 나는 바나나다. 생김새로 따지자면 길쭉한 남편을 바나나로, 작고 동글한 나를 달걀로 비유하는 게 맞다. 달걀과 바나나로 외모를 묘사하려는 것이 아니라 사고방식을 표현하려 한다. 노란 껍질을 벗기면 속이 하얀 바나나처럼 생김새는 동양인이면서 독일인처럼 사고하는 나는 바나나에, 겉은 흰 달걀처럼 뽀얀 독일인이지만 속은 노란 알처럼 동양적 사고를 하는 남편은 달걀에 빗댄 것이다. 독일에서 산 날이 한국보다 많아지면서 나는 점점 바나나가 되었고, 한국 여자랑 사는 세월이 더해감에 따라 남편은 달걀이 될 수밖에 없었으리라. '화성에서 온' 남자와 '금성에서 온' 여자가 부부로 사는 것이 우주의 온갖 기운을 받아도 쉽지 않은 터에 다른 문화와 사고 환경에서 자란 우리는 오죽했으랴. 각자 서로에게 닿기..

전반전 이야기 2022.06.09

나는 재밌게 살기로 했다

나는 아직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지 못했다. 한 문장을 세 번 정독해도 이해가 안 되면 나의 이해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둘 중 하나다. 저자도 모르거나, 읽는 이의 입장에서 쓰지 않았거나. 반년이 지나도록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라면 역시 둘 중 하나다. 답이 없거나, 답하는 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뭉뚱그린 질문이거나. 이제 질문을 다시 들여다볼 때이다.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쪼개 보자.은퇴 후 나는1. 무엇을 할 수 있을까?2. 무엇을 하면 좋을까?3. 무엇을 하고 싶은가?하나의 물음에 세 질문이 숨어있다. 이러니 답을 못 찾은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잘하는 것을 은퇴 후에 하는 경우다. 내가 잘하는 것? 많다. 분석, 계획, 끈기, 추진..

그리고 후반전 2022.06.08

독일 회사의 사원 평가

대부분의 독일 회사는 연말이 되면 각 개인의 실적에 대한 평가 회의(Mitarbeiterjahresgespräch)를 실시한다. 평가 회의는 상사와 1:1로 진행된다. 상사는 자기 상사와 또 평가 회의를 한다. 이러한 피라미드식 사원 평가가 1년에 한 번 실시된다. 회의는 12월 초에 시작되어 보통 3월 말이 돼서야 마무리된다. 회사마다 자체 제작한 평가서를 제공한다. 부하직원과 상사 모두 회의 전에 평가서를 작성한 후 이를 토대로 한 해 실적에 대한 평가, 능률을 올리기 위한 개선점, 내년 목표 설정, 그리고 연봉 등에 대해 의견을 나눈다. 나의 두 번째 직장 A에서의 사원 평가를 소개하겠다.A 회사는 2,000여 명이 일하는 IT 회사다. 사원 평가서는 크게 협업, 업무 조직, 업무의 질, 업무량, ..

전반전 이야기 2022.05.02

독일 한글학교에서 글과 역사를 가르치다

나는 1994년부터 3년 6개월 정도 독일 본(Bonn)에 있는 한글학교에서 교사로 일했다. 다섯 학급에 학생 수는 50여 명 남짓의 한글학교는 독일 학교를 빌려 학기 중 토요일에만 운영되었다. 수업은 세 시간 동안 진행됐다. 본 대사관 분관에서 제공하는 ≪재외 한국 동포들을 위한 한국어 교재≫ 또는 국내의 초등학교 국어 교과서를 교재로 사용했다. 학생들은 교포 2세, 한독가정 아이들, 그리고 유학생 자녀들이었다. 대부분의 교포 2세들은 고학년에 속했고 한독가정과 유학생 자녀들은 유치원생 혹은 저학년생이었다. 한글 자모부터 가르쳐야 하는 '한독가정반'이 내게 맡겨졌다. 아이들이 한국어를 거의 알아듣지 못하더라도 되도록 한국어로 수업했고, 설명이 필요한 부분만 독일어로 말했다. 수업 중에 가끔 아이들에게 ..

전반전 이야기 2022.04.26

기억에 남는 중국 여행

요즘 도나우(Donau) 동네는 터져 나오는 봄꽃들로 알록달록하다. 서재 창가 너머로 보이는 하얀 자작나무 줄기에는 머리를 땋아놓은 듯한 연한 꽃들이 길게 매달려 있다. 눈길이 머무는 봄 풍경이지만 나는 오싹한다. 자작나무 꽃가루 알레르기 때문이다. 봄볕이 좋아 잠시 외출이라도 하면 눈이 따끔거리고 목 안이 붓는다. 눈 주위가 벌게지고 불편해지는 이맘때가 되면, 나는 그해의 중국 여행을 떠올린다. 2007년 3월 초 남편과 함께 상하이(上海)와 핑야오(平遥)를 여행했다. 핑야오는 명·청나라 때 금융 중심지였다. 베이징(北京)에서 비행기를 타고 타이위안(太原)에 도착해 하룻밤을 묵었다. 다음날 관광차로 핑야오로 떠날 예정이었다. 비록 하룻밤 거쳐 가는 도시지만 잠시 둘러보려고 호텔을 나서니 안개가 낀 듯 ..

전반전 이야기 2022.04.21

찬란한 유산

24년째 쓰는 가계부는 우리 집 살림의 빅데이터다. 이 빅데이터로 여러 가지 통계를 낼 수 있다. 성경에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라고 한다. 지난 세월의 지출을 보면 남편과 나의 마음이 어디에 가 있었는지 알 수 있다. 주택구입 같은 일회적인 지출과 투자용 저축을 제외하고, 23년간 꾸준히 지출된 항목 중에서 순위를 매겨봤다. 2022년 올해의 지출 비용은 포함하지 않았다.1위는 주(住)다. 집 없이 산 세월도 있고 내 집에서 산 날도 있다. 월세든 관리비든 독일에서 집과 관련된 비용이 높다. 놀랍지 않은 결과다. 2위는 선교 및 구제다. 복음을 전하는 일과 곤경에 빠진 사람들을 위해 내어 준 돈이 입는 데(衣) 쓴 것보다 4배가 많고 먹는 데(食) 지출한 돈보다 2배가 많다. 1위와 단..

전반전 이야기 2022.04.18

일기보다 가계부

꽃보다 남자, 일기보다 가계부다. 일기는 드문드문 쓰지만 가계부는 신혼 초부터 매일 쓰고 있다. 가계부는 아날로그과 디지털, 두 가지 방식으로 작성한다. 한 해가 시작되기 전에 내가 직접 만든 열두 달 치 가계부를 출력해놓는다. 수입과 지출이 생길 때마다 종이 가계부에 빠짐없이 기록한다. 매달 마지막 날에는 종이 가계부에 쓴 한 달 치 내용을 엑셀로 만든 디지털 가계부에 옮겨 쓴다. 가계부의 전산화는 통계를 위해서다. 열두 칸이 빼곡히 채워지는 연말에는 일 년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한눈에 볼 수 있다. 내가 24년째 가계부를 쓰는 이유는 이렇다.첫째, 저축을 체계화할 수 있다. 한 달 생활비를 예측할 수 있어서, 저축 먼저 하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매월 1일, 나는 수입에서 한 ..

하프타임 2022.04.16

나는 50대 아줌마 개발자였다

나는 독일에서 25여 년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일했다. 30대부터 50대를 개발자로 살았다. 치열했으나 뿌듯했고 재밌었으나 힘들었던 때는 흰머리가 꽤 늘어난 50대였다. 50대 개발자로 일했던 마지막 회사는 독일의 노동청과 복지부에서 사용하는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IT 회사였다. 첫 부서에서 나의 업무는 기존 제품의 유지관리와 보수였다. 내 능력의 60~70%만 투입하면 해결되는 업무였다. 나 또한 굳이 내 능력의 100%를 꽉 채우려고 일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퇴근길에 장을 봐 저녁밥 짓는 데 공을 들이고, 헬스장에 등록해 운동하며, 빛의 속도로 쏟아지는 IT 기술을 짬짬이 공부할 수 있는 시간적 여유가 생겼다. '이게 사는 거지, 뭐'라고 스스로 다독였지만 속은 시끄러웠다. 업무는 지루했고 개발자로 일..

전반전 이야기 2022.04.12

단짠단짠의 책읽기

나는 침대에서 스탠드 불빛으로 책을 읽고 있다. 옆에 비스듬히 앉아 독서하는 남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터지는 웃음을 꾹꾹 누르고 있다. 참던 방귀 쏟아지듯이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크게 웃어본다. 김호연 작가의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다. 뭐 이런 한숨 나오는 이야기를 몽글몽글 유쾌하게 쓴다니. 하루의 끝자락에 책 읽기는 꿀맛이다. 우리 집 침실에는 TV(어차피 이건 집에 없다), 오디오 같은 전자 기기가 없다. 잠들기 전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은 침실 문을 넘지 못한다. 남편과 나의 불문율이다. 스마트폰은 침실 앞 협탁에 무음으로 올려놓는다. 잠들기 전 나는 전자책을 읽고 남편은 종이책을 읽는다. 내게 전자책은 4차 산업혁명에 버금간다. 읽고 싶은 모국..

하프타임 2022.04.07

나의 스크럼 이야기

마지막 일터에서 나는 주 4일(에 준하는) 근무를 했다. 근로계약서에는 주당 5일 40시간 근무와 일 년 30일 유급휴가가 명시되어 있다. 월요일부터 목요일까지는 스크럼(Scrum) 방식에 따라 팀 과제를 수행했고 금요일에는 부서 활동을 했으니 업무로만 따진다면 완벽한 주 5일 근무는 아니었다. 금요일에는 팀 과제를 수행하지 않고 서로 필요한 정보를 교환하거나 주제를 정해 토론하는 식의 소규모 워크숍을 진행했다. 참석 여부는 각자가 결정했다. 부서 활동을 하는 금요일을 오픈 프라이데이(Open Friday)라고 불렀다.마당에 꽃 가꾸고 그림 그리는 나의 언니가 스크럼이 뭐냐고 물어보면 이렇게 설명할까 한다."언니가 스크럼의 역사, 고안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은 없을 테니 이건 패스~. 스크럼은 팀이 과제를..

전반전 이야기 2022.04.04

그 아이, 정아

드디어 밤을 꼴딱 새우고 봤다. 드라마 을.그리고 그 아이, 정아를 기억해냈다. 은 오래전 언니가 꼭 보라던, 생각할 거리가 많고 재밌다며 추천했던 드라마였다. 하지만 보지 않았다. 한번 시작하면 중간에 끊지 못하고 밤새고 볼 테고, 출근해서도 다음 내용이 궁금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테니까. 주중에는 회사 일로, 주말에는 밀어뒀던 집안일 하느라 은 내게서 금세 잊혔다. 자발적 은퇴가 시작된 올해 초부터 더 이상 회사에 매이는 시간은 없지만 '드라마나 보고' 있기는 싫었다. 그러다 얼마 전에 허리 디스크가 터져 남편이 병원에 입원했다. 혼자 있는 집에 사람 목소리가 필요했다. 불현듯, 문득, 느닷없이 이 생각났다. 드라마를 보는 내내 나는 초등학교 때 우리 반 아이, 정아(이름이 정화일 수도 있겠다)를 ..

하프타임 2022.03.31

달력의 용도

나는 머리가 복잡하면 달력 한 장을 뜯어낸다. 달력은 크면 클수록 좋다. 뒤죽박죽 엉켜있는 생각을 단어 혹은 단문으로 텅 빈 달력 뒷면에 하나씩 끄집어낸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적는다. 색연필, 사인펜, 북 마커가 총동원된다. 머릿속에서 꺼낸 순서가 아닌, 같이 묶을 수 있는 덩어리로 적다 보면 하얀 달력 위에는 자석에 붙은 쇳가루 모양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내 생각을 형체로 마주한다. 분류화 작업의 어려움은 포스트잇으로 보완한다. 작업이 끝나면 벽에 붙여놓고 나와 소통한다. 생각 묶음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하지 말 것들을 솎아내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회사에서는 마인드맵(Mindmap)을 사용했지만, 내 머릿속을 쏟아놓는 데는 달력을 이용한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한다. 텅 빈 백지가 주..

하프타임 2022.03.28

나는 쇼핑이 싫다

나는 쇼핑이 싫다.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니, 쭈욱 그럴듯하다. 뭘 살지도 모르면서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는 것이 내게는 꽤 피곤한 일이다. 계절이 바뀌면 무슨 옷이 필요한지 파악해서 구매 목록을 작성한다. 목록 작성이 끝나면 아주 큰맘 먹고 주말에 쇼핑하러 나간다. 가장 짧은 동선으로 이동하면서 구매 목록을 지워나간다. 한 가게에서 다 살 수 있으면 횡재한 날이다. 쇼핑은 내게 재미가 아니라 일이다. 그것도 어지간히 하기 싫은 일이다. 나 역시 충동구매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바지 한 벌 사려고 갔는데 아주 맘에 들면 다른 색상으로 두어 벌 더 산다. 같은 모양인데 색깔만 다르게. 이러면 다음 해까지 바지 살 일이 없다. 편리함 외에 내가 충동구매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냥, 갑..

하프타임 2022.03.24

서화의 펭귄 인형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재주 하나가 늘었다. 내 손이 저울이 되었다. 처음 한국에 오갈 때는 일일이 가방 무게를 쟀지만 이제는 쓱 들어보면 견적이 나온다. 매번 독일로 가져올 짐이 그리도 많은지 내 손저울은 아슬아슬하다. 나는 체크인할 때 무게 초과로 짐 빼는 것이 끔찍이도 싫다. 등 뒤로 줄 서 있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열어젖힐 때면 투명망토라도 뒤집어쓰고 싶다. 더 질색인 것은 계획해서 꾸린 가방에서 계획 없이 뭔가를 꺼내야 한다는 점이다. 무게 초과한 가방에서 무엇을 빼내야 할지에 대한 순간적 판단은 '계획의 여왕'인 나에게는 너무나 무리한 요구다. 한국에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이 참 많다. 다 가져오고 싶지만 어지간한 것들은 독일에서 산다. 우리 집에 예쁘고 앙증맞은 것 ..

전반전 이야기 2022.03.23

독일 사람들은 정말 쌀쌀맞을까?

독일에 사는 외국인들에게 독일 사람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으면 대부분 '쌀쌀맞다', '차갑다'라고 말한다. 나도 그렇게 생각할까? 만약 내가 '그 사람들'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 선입견을 깨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르겠다. 에피소드 하나아주 오래된 이야기다. 따사로운 햇살이 비취는 5월 중순 어느 토요일, 누군가의 갑작스러운 제안으로 친구들과 당일치기로 라인(Rhein)강을 따라 자전거 여행을 했다. 계획 없이 떠나는 여행이 주는 설렘 가득, 우리는 제각기 끌고 나온 고물 자전거에 올라탔다. 라인 강변은 조깅하거나 산책하는 사람들, 그리고 우리처럼 자전거를 타는 사람들로 무척이나 붐볐다. 앞서거니 뒤서거니 신나게 자전거를 타고 있는데 일행 중 한 명의 자전거에 문제가 생겼다. 바퀴가 터져 ..

전반전 이야기 2022.03.19

야콥의 호박

야콥은 이웃집 아홉 살 난 꼬마의 이름이다.도나우(Donau) 동네로 이사 와서 사귄 첫 이웃의 아이다. 말없이 제 엄마 곁에 서 있기만 하던 야콥이 낯이 익자 저세상 말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내가 도저히 알아들을 수 없는 바이에른(Bayern) 사투리다. 올망똘망 귀엽게 생긴 아이 입에서 흘러나오는 별나라 말에 홀려 나는 눈에 하트 서너 개는 달고 연신 고개를 끄덕인다. 아이는 자기 말을 못 알아듣는 나를 이해 못 하는 눈치다. 야콥은 나의 표준 독일어를 잘 알아듣는다. 작년 가을 이삿짐 정리가 대충 끝나갈 무렵, 두어 번 마주친 야콥이 제 엄마와 함께 우리를 찾아왔다. 야콥 엄마의 두 손에는 커다란 호박이 들려 있었다."야콥이 추수한 호박이에요. 수프로 먹으면 맛있어요."세상에나, 저 콩알만 한 아이..

하프타임 2022.03.18

팀, 플러스 섬 게임

내가 마지막으로 일했던 팀에는 모든 DISC 성격 유형이 존재했다. 주도형(Dominance), 사교형(Influence), 안정형(Steadiness), 그리고 신중형(Conscientiousness). 나는 신중형이다. 관리자는 한 팀에 DISC 유형이 골고루 있으면 이상적인 팀 구성으로 여긴다. 서로 보완하며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퇴사한 회사에서, 한 번은 팀이 크게 삐걱댄 적이 있었다. 사교형인 동료가 그해 목표로 주도형이 되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은 주도형과 사교형의 경계에 있는데 주도형으로 넘어가겠다면서. 한번 말 섞기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모르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부서의 최신 정보는 꿰고 있는 동네 통장 같은 친구였다. 게다가 어찌나 말솜씨가 좋은지 논쟁이 붙으면 당해낼..

전반전 이야기 2022.03.16

칼린 이야기

시아버지 칼린이 들려준 이야기다."마을 한가운데 있던 성당 첨탑에서 12시가 되면 종소리가 울려 퍼져. '정오구나. 점심 먹을 때가 됐네.'라고 생각했지." 칼린은 독일 나치 정권 때 소년병으로 징집되었다. 독일이 패전한 후 프랑스의 포로수용소에 갇혀 지냈는데 늘 배가 고팠다. 전쟁포로로 농가에서 강제 노역을 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나았다. 일은 고되어도 배는 곯지 않았으니까. 뼈가 바스러지게 일하고 있으면 뎅그렁~ 뎅그렁~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시계는커녕 변변한 밭일하는 장비도 없이 일하던 칼린에게 종소리는 12시가 되었으니 곧 밥 먹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노역하던 농가에서 점심밥만큼은 넉넉하게 줬다. 전쟁을 겪고 포로 때의 배고픔 때문이었을까? 칼린은 밥을 남기지 않았다. 식당에서 남은 음식은 ..

전반전 이야기 2022.03.11

중국을 사랑하는 남자

중국을 사랑하는 남자, 내 남편이다.오죽하면 '내가 좋아, 중국이 좋아?'하고 물어볼 정도다. 어찌나 기묘하게 빠져나가는지 아직 답을 듣지 못했다. 우리는 본(Bonn) 대학교 학생 식당에서 처음 만났다. 남편은 90년도 초에 중국에서 3년 유학했고, 이후 본 대학에서 중국어를 전공했다. 지금은 출판사에서 일하지만 직업경력 8할은 중국 무역과 금융에 관련된 일이었다. 남편이 무역 회사에 다닐 때 1년에 서너 번은 중국으로 출장을 갔다. 남편의 일정이 끝날 즈음이면 나도 중국으로 날아가 둘이서 여행을 하곤 했다. 한 번은, 남편의 거래처에서 내가 중국에 와 있는 것을 알고 저녁 식사에 초대한 적이 있었다. 식사 내내 대여섯 명의 거래처 직원들과 능숙하게 중국어로 대화하는 남편이 참 멋져 보였다. 똑똑한 아..

그리고 후반전 2022.03.10

'야반도주'를 하다

2021년 가을, 남편과 나는 필사적으로 루르(Ruhr) 공업지역을 떠났다. 그곳에서 9년을 살았다. 우리들의 직장 때문에 정착한 곳이었지만 사는 내내 마음이 가지 않았다. 일단 사람이 너무 많았다. 축구 (정확히 말하면 FC Schalke 04 또는 Borussia Dortmund 축구팀) 아니면 할 얘기가 없었다. 그리고 개똥을 치우지 않았다. 이것만으로도 그 동네를 떠날 이유가 충분했다. 루르 공업지역은 여러 도시로 이뤄진 메트로폴리스다. 이에 속한 대표적인 도시가 에센(Essen), 보훔(Bochum), 도르트문트(Dortmund) 등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철강과 석탄 산업의 발달로 튀르키예, 그리스, 이탈리아 등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들이 이 지역의 탄광에서 일했다. 1960~70년대 대부분의 ..

하프타임 2022.03.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