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전 이야기

서화의 펭귄 인형

선한 부자-이현주 2022. 3. 23. 05:41

외국에서 오래 살다 보니 재주 하나가 늘었다. 내 손이 저울이 되었다. 처음 한국에 오갈 때는 일일이 가방 무게를 쟀지만 이제는 쓱 들어보면 견적이 나온다. 매번 독일로 가져올 짐이 그리도 많은지 내 손저울은 아슬아슬하다.

 

나는 체크인할 때 무게 초과로 짐 빼는 것이 끔찍이도 싫다. 등 뒤로 줄 서 있는 낯선 사람들 앞에서 지극히 사적인 영역을 열어젖힐 때면 투명망토라도 뒤집어쓰고 싶다. 더 질색인 것은 계획해서 꾸린 가방에서 계획 없이 뭔가를 꺼내야 한다는 점이다. 무게 초과한 가방에서 무엇을 빼내야 할지에 대한 순간적 판단은 '계획의 여왕'인 나에게는 너무나 무리한 요구다.

 

한국에는 아기자기하고 예쁜 것들이 참 많다. 다 가져오고 싶지만 어지간한 것들은 독일에서 산다. 우리 집에 예쁘고 앙증맞은 것 대신 튼튼하고 투박한 것들이 많은 이유다. 요즘은 거의 모든 한국 식품을 독일에 있는 온라인 몰에서 살 수 있다. 고로 이것들도 두고 온다. 그런데도 내 손저울은 늘 경고음을 울린다. '삑~ 무게 초과!'

 

내가 포기하지 못하고 가져오는 것들은 주로 책, 그리고 엄마와 올케가 해주는 밑반찬이다. "제발, 밑반찬 좀 많이 하지 마세요" 해도 내가 독일에서 어떻게 먹고사는지 직접 본 엄마는 내 말을 귓등으로 넘기신다. 엄마가 우리 집에 오셨을 때 냉장고에 밑반찬 하나 없었으니까. 퇴근해 돌아온 허기진 딸내미와 사위가 엄마가 해준 저녁밥을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이 먹어 치우는 것을 보셨으니까. 맛나게 먹는 우리 앞에 앉아 "헤고 불쌍한 것들, 어여 많이들 먹어."라며 추임새를 넣던 엄마는 내가 독일로 떠나기 전날에 아버지와 함께 명절 쇠는 장을 보신다. 그것으로 만든 밑반찬이 내 트렁크의 7할을 차지한다.

 

엄마가 만든 밑반찬은 두고 올 수 없으니 책을 줄여야 했다. 돈벌이에 필요한 책 외에도 소설과 에세이도 가져오고 싶었지만 무거워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러다 묘안이 떠올랐다. 양보다 질! 장편 소설 한 권 대신 ≪이상 문학상 작품집≫ 또는 ≪올해의 좋은 소설≫ 같은 단편 소설집을 샀다. 책 한 권에 예닐곱, 운 좋으면 열 권의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게다가 상 받은 글들이니 작품성도 보장되었다. 한마디로 꿩 먹고 알 먹으며, 도랑 치고 가재 잡는 격이었다. 서재 책장을 보니 ≪이상 문학상 작품집≫은 2015년까지 사왔다. 이후로 내게 전자책의 시대가 열렸다.

 

가방을 쌀 때면 나는 날이 서 있다. 제한 무게를 넘기지 않게 가방을 싸는 것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무릎이 불편한 엄마가 종일 만들어주신 밑반찬을 나는 차마 덜어내지 못한다. 엄마와 긴 실랑이 끝에 간신히 내 손저울이 그린라이트를 켤 때쯤 되면 올케가 들이닥친다.

"형님, 독일 가서 드시라고 밑반찬 해왔어요."

워킹맘인 올케는 퇴근 후에 장을 봐서 무늬도 고운 밑반찬을 종류별로 만들어온다. 늦은 밤에 서울에서 파주까지 밑반찬 해오는 고마운 사람. 이것도 놓고 올 수 없다. 나는 다시 짐을 모조리 꺼내놓고 올케의 밑반찬으로 테트리스 게임을 한다.

 

독일로 떠나기 하루 전날 밤이었다. 엄마와 올케가 만들어준 밑반찬으로 짐 싸는 씨름을 하고 있는데 가방 속 귀퉁이에 손바닥만 한 펭귄 인형이 눈에 들어왔다. '이게 뭐지? 잘 못 들어갔나 보네.' 생각하며 방 한쪽 구석에 치워두었다. 다음 날 떠난다니 여기저기서 걸려 오는 전화에 한눈팔다 다시 가방 속을 들여다보니 치워둔 펭귄 인형이 다시 들어가 있었다. 짐 싸는 것을 새초롬하게 지켜보던 여섯 살 조카가 수상했다.

"이 펭귄, 서화가 넣은 거야?"

"네, 고모 줄 거예요."

자기처럼 까맣게 생긴 펭귄을 고모가 눈앞 가방에 싣고, 아직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독일이라는 별나라로 데리고 갔으면 하는 그 간절한 눈빛을 나는 외면할 수 없었다. 내 손저울이 무게 초과라고 앵앵 울어대든 말든.

 

서화의 펭귄 인형은 꽤 오랫동안 우리 집 거실 장의 터줏대감이었다. 보고 있자면 내 한국 방문이 끝나갈 즈음의 아쉬움과 집 안 가득 배어 있던 밑반찬 냄새가 내 마음속에서 그리움으로 스멀스멀 올라왔다. 할머니와 엄마처럼 고모에게 자기도 뭔가를 주고 싶어 갖고 놀던 제 펭귄 인형을 몰래 가방 안에 넣어둔 서화. 그 꼬맹이를 반찬 냄새 가득한 내 마음속에서 반갑게 만나곤 했다.

 

ⓒ 2022. 이현주
Germa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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