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내 남편을 '오 서방'이라고 부르신다.
"잘 지냈는가, 오 서방~"
"오 서방, 언제 한국 올 텐가?" (장모님의 이 질문에 대한 오 서방의 대답은 늘 '내일'이다.)
큰 사위는 강 서방, 막내 사위는 전 서방, 그리고 둘째 사위는 오 서방으로 일관성 있게 부르신다. 남편의 성이 '오' 씨 일리가 없다. 남편의 성은 올브리히(Olbrich)이다. 이 복잡한 발음에서 첫음절을 뚝 잘라내 엄마는 이국의 사위에게 오씨 성을 만들어 주셨다.
어느 날 남편에게 물었다.
"내 삶의 모토는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겁게 살자!'야. 당신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남편이 "Happy wife, happy life!"를 외쳤다. 남편의 슬기로운 삶의 모토가 마냥 좋지만은 않다. 살짝 미안한 마음마저 든다. 지기 싫어하는 아내와 살다 보니 인생 모토가 'Happy wife, happy life!'가 돼버린 건 아닌지.
우리는 결혼 7년 차에 독일에 집을 장만했다. 골조만 지어진 새집이라 내장재는 우리 마음대로 정할 수 있었다. 욕실 타일을 정하는 데 우리의 의견은 크게 갈렸다. 나는 흰색과 검은색, 남편은 비취색과 파란색 조합을 원했다. 며칠을 입씨름해도 둘 다 꿈적하지 않았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새집을 꾸미고 싶은 마음은 남편도 나와 매한가지였다. 한쪽의 양보를 강요할 수도 없었고, 하고 싶지도 않았다. 욕실 타일 말고도 세상에 포기하고 양보할 것이 얼마나 많은데. 이깟 타일쯤은 각자의 취향대로 하기로 했다. 다행히 욕실이 두 개라, 하나는 남편이 바라던 대로 알록달록하게 꾸미고 다른 하나는 내 취향에 따라 검고 흰 타일을 붙였다. 비록 통일성은 없었지만 뭣이 중헌디!.
공중목욕탕의 타일 색을 끝까지 고수하던 남편이 이제는 어지간하면 나의 의견에 따른다. 신혼 초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남편의 이런 변화는 지지 않으려는 나 때문일 것이다. 숨 가쁘게 경쟁하던 삶에서 지지 않으려던 애씀이 습관이 되어버렸다. 동양 여자로 직장에서 독일 남자 동료들에게 지지 않으려고 기를 쓰는 것을 오랜 시간 보아온 남편이다. 남편은 나의 애씀을 대견해하면서도 짠해했다. 'Happy wife, happy life!'는 마우스피스 장착하고 권투 글러브 단단히 움켜쥐며 '덤벼, 한 방에 날려줄 테니'라며 전투력 충만한 내 두 손에 살포시 올려진 남편의 손 같다. '나한테는 이기려 하지 않아도 돼. 내가 그냥 져줄게.'라는 묵언의 배려에 나는 무장 해제된다.
≪아주 보통의 행복≫에서 저자 최인철은 지지 않는 사람이 싫다고 일갈한다.
지지 않는 사람들은 [...] 어떤 경우든 상대의 자존심을 건드려 본때를 보여주려고 한다. 그렇게까지 하지 않아도 될 일임에도 반드시 상대의 자존심에 상처를 내고야 말며, 자신의 역린을 건드린 사람이라고 판단되면 가차없이 내친다. 하지 말아야 할 말, 넘지 말아야 할 선을 의도적으로 그리고 습관적으로 넘는다. [...] 지는 연습을 해야 한다. 져주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져야 한다.
≪아주 보통의 행복≫(최인철 저 / 21세기북스)
습관적으로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으며 지지 않는 사람은 나도 싫다. 저자의 조언대로 나는 지는 연습을 해보기로 한다. 마우스피스 뱉어내고, 두들겨 패려고 쓰고 있던 글러브도 던져버리고, 제대로 져보려고 한다. 일단 시작은 오 서방에게서. 'Happy husband, happy life!'
기 센 남편에게 평생 눌려 사는 엄마는 '기 센 딸'이 '착하디 순한' 당신의 사위, 오 서방에게 횡포 부리며 살지는 않을까 늘 걱정이시다. 국제전화 때마다 딸보다 오 서방 안부를 먼저 물으신다. 오 서방은 좋겠다, 든든한 장모님이 계셔서. 큰 사위는 든든하고, 막내 사위는 막내아들 같다는 엄마에게 "오 서방은?" 하고 물었다.
"둘째 아들이지. 오 서방 부모님 이제 다 돌아가셨잖아. 곧 우리나라에 와서 살면 내가 오 서방한테 엄마 해줘야지."
이 말을 전해 들은 오 서방은 감격해했다.
"오 서방, 언제 한국 올 텐가?"
엄마의 지치지 않는 이 질문에 이제는 농담이 아닌, 정말로 '내일'이라 답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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