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에 외국인 300만 명이 살고 있다. (머니투데이, ‘한국 체류 외국인 인천 인구에 육박’ 기사 참조)
이 중 한 명이 나의 독일인 남편, '오 서방'이다. 결혼 25년 차가 되던 2023년 가을, 남편과 나는 독일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왔다. 나는 재외국민에서 내국인으로, 남편은 외국인등록증을 받아 1년, 2년씩 F6 비자를 연장하며 살고 있다. 올가을이면 어느덧 한국 거주 만 3년이 된다.
남편은 한국에 오자마자 정부가 지원하는 사회통합프로그램을 통해 한국 말과 문화를 배우더니, 올봄에는 마지막 5단계까지 마쳤다. 거의 무료로 배웠다. 이외에도 글로벌센터, 주민센터 등 한국어를 무료로 배울 기회는 많다. 참 고마운 대한민국이다.
나의 게으른 실수에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속담을 던지며 화 대신 웃음을 주는 남편. 한국어로 슬쩍 돌려까는(?) 모습을 보면 제법 한국어에 자신감이 붙은 듯하다. 하지만 그 자신감이 종종 와르르 무너지곤 하는데, 순위를 매겨보면 이렇다.
3위. 남편이 “안녕하세요” 하고 공손히 인사하면 돌아오는 “헬로우~”. 한국어 인사에 웬 헬로우? 남편은 한국어로 말할 의욕을 잃어버리곤 한다.
2위. 상점이나 기관에서 열심히 준비한 한국말로 물어볼 때. (이 한 문장을 만들기 위해 머릿속이 얼마나 분주했을까!) 하지만 상대는 못 알아듣고 옆 사람에게 되묻는다. “뭐라는 겨?” 남편은 집에 와서 상기된 얼굴로 내게 따지듯 묻는다. “내 발음이 그렇게 이상했어, 응?!” 아니야, 그 사람들 귀가 이상한 거야, 다독다독...
1위. 남편이 던진 질문에 나를 보며 답할 때. 남편은 영락없이 닭 쫓던 강아지 꼴이 된다. 보는 내가 다 안쓰럽다.
어느새 3년 차에 접어들지만, 첫해 남편의 한국살이는 산 넘어 산이었다.
우선 실손보험에 가입하려면 스마트폰부터 개통해야 했다. 통화량이 많지 않아 알뜰폰을 신청하려 했지만, 대부분의 통신사는 외국인을 받아주지 않았다. 어찌어찌 스마트폰을 개통해 저렴하다는 온라인 실손보험에 가입하려니 이번엔 '5'로 시작되는 외국인등록증 뒷번호가 걸림돌이었다. 온라인 가입 시 주민등록번호 뒷자리 첫 숫자로 '1'이나 '2'만 입력이 가능했다. 은행 통장 개설도 난관이었다. 남편 이름이 너무 길어 은행 시스템에 다 들어가지 않았다. 중간에 뚝 끊겨 버린 통장 이름과 외국인등록증 이름이 다르니 본인 인증 실패. 본인 인증이 안 되니 불편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어느 기관은 영문 이름을 쓰라 하고, 다른 기관은 한글로 쓰라 하고... 영문과 한글이 충돌을 일으키며 번번이 인증에 실패했다. 산 하나 넘으면 또 다른 산이 버티고 있던 첫해였다.
외국인 300만 시대, 진정한 글로벌 대한민국이 되려면 조금 더 섬세한 행정이 필요해 보인다. 원래 악마는 디테일에 숨어 있는 법이니까.
그사이 스마트폰도 개통하고, 통장도 만들고, 민간 인증도 뚫어내며 남편은 오늘도 어찌어찌 한국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남편을 정말 힘들게 하는 것은 따로 있다. 300만 외국인과 더불어 살 준비가 덜 된 행정도, 참을 인 자 세 개를 씹어먹어도 마인드컨트롤이 힘든 운전 매너도 아니다. 절대 주정차 금지 구역에 비상등 하나 켜놓고 버티는 분노 유발자들도 아니다. (독일에서 수십 년 운전하면서 비상등을 켜본 적이 있던가? 한국에선 마치 그걸 누르면 차가 뿅 하고 사라지는 마법의 버튼이라도 되는 듯하다.) 멀쩡히 길 가다 얼굴 밀어 넣으며 “Where are you from?”을 묻는 나이 지긋해 보이는 이들의 무례함은 불쾌할지언정 한국살이를 고민하게 만들진 않는다. 지하철 노약자석에 앉아 손가락질하며 키가 크네, 잘생겼네 외모 품평을 하는 노인들과 맞닥뜨리면 슬그머니 다른 칸으로 피하면 그만이다. 왕년에 학교 다닐 때 독일어 좀 배웠다며 대뜸 “이히 리베 디히” 사랑 고백을 날리는 아저씨들은 이상하긴 해도 넉살 좋아 보인단다. 백화점에서 뒷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줬다가, 아무도 문을 안 잡고 종종걸음으로 빠져나가는 바람에 졸지에 백화점 문지기 직원이 되어버린 황당한 경험도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는 추억이다.
놀랍게도, 정작 남편을 괴롭히는 것은 ‘검은색’이다.
검은 옷, 검은 신발, 검은 자동차. 대한민국은 온통 검은색으로 넘쳐난다. 검은 옷을 입은 사람들이 검은 차를 타고 다니며 표정조차 없다. 검은 모자에 눈만 내놓은 '별당아씨 복면'을 두른 사람들. 눈도 마주치지 않는 무표정과 무채색의 사회에서 남편은 숨이 턱턱 막힌다고 한다. 마치 법으로 정해놓기라도 한 듯 검은색 일색인 이 사회에 소심하게 반발하듯, 남편은 빨강, 노랑, 파랑, 분홍 옷을 입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남편을 앞세워 매장을 몇 바퀴나 돌고 돌아도 눈에 보이는 건 죄다 무채색뿐. 아, 알록달록한 옷들이 있긴 있다. 골프웨어.
그래서 찾아봤다. 한국인이 검은색 옷을 주로 입는 이유에 관한 글과 영상이 적잖았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튀지 않으려고'이다. 집단주의 문화, 중간을 미덕으로 여기는 사회 풍조. 튀는 색을 입어 쏟아지는 시선을 감당하느니 무난한 검은색을 입고 집단 속으로 스며들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아하, 그래서 그랬구나! 개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다름이 틀린 것이 아니라는 문화 속에서 자라난 남편이 유독 검은색의 대한민국을 힘들어하는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이래저래 녹록지 않은 한국살이지만, 오늘도 남편은 자기만의 알록달록함을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다. 더위가 가시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날, 또 다른 한국어 수업에 늦지 않게 서둘러 나가는 남편의 두 발엔 하늘색 운동화가 신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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