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크푸르트 국제 공항에서 출발한 비행기는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30여 분 전부터 서서히 고도를 낮춘다. 단번에 내 귀가 막힌다. 물을 마셔보고 입으로 크게 숨을 쉬어봐도 소용없다. 착륙이 임박하면 막힌 귀가 팽팽하게 아려온다.
은퇴도 마찬가지였다. 14개월의 준비 기간을 가졌지만 은퇴의 충격은 적지 않았다. 매달 통장에 찍히던 월급이 사라졌다. 이럴 줄 알고 대책을 세워놨지만 팽팽한 귀 막힘은 어쩔 수가 없었다.
회사를 그만둔 지 얼마 안 돼서 아버지의 전화를 받았다.
"딸, 너 이제는 실업자니까 용돈은 그만 보내."
'아버지, 저 실업자 아니고 은퇴자예요!'
아버지에게 은퇴자와 실업자는 동의어인가 보다.
내 건강보험 카드의 이름 앞에는 'Dr.'라고 쓰여있다. 독일에서는 박사학위를 한 사람의 신분증에 'Dr.'를 표기한다. 병원에 진료받으러 가면 의사들이 무슨 박사인지, 하는 일은 뭔지 묻곤 했다. 올봄 처음 간 동네 병원에서 살갑게 말을 부치던 의사가 내 직업을 물었다. 나는 얼떨결에 소프트웨어 개발자라고 했다. '은퇴해서 더 이상 일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원해서 한 은퇴에, 내가 떳떳하질 못했다. 그렇게 바라던 은퇴였는데 막상 직업을 묻는 말에 허둥거렸다. 집에 돌아와서 꾹꾹 눌러 적은 'Todo' 포스트잇 하나를 벽에 붙였다.
'직함 빼고 이력 빼고, 은퇴 후 명함을 만들 것!'
내가 누구인지 직업과 이력으로 설명하던 때는 지났다. 갓 은퇴한 지금은 이름 석 자 외에 쓸 내용이 없지만 이 또한 살면서 채워가야지.
얼마 전에 봄옷을 샀지만 입고 나갈 데가 없었다. 그나마 남편이 병원에 입원하는 바람에 병문안 차 몇 번 입어보았다. 복장이 자유로웠던 IT 회사에서는 청바지에 티셔츠가 나의 오피스룩이었다면, 은퇴한 요즘은 집 근처에 등록한 헬스장에 가거나 등산할 때 입는 기능성 옷이 내 외출복이다. 트레킹 좋아하는 내게 등산복과 장비가 하나씩 늘고 있다.
은퇴해도 나는 여전히 바쁘다. 입술이 위아래로 번갈아 가며 부르튼다. 큰맘 먹고 산 해먹 의자에는 먼지만 쌓이고 있다. 멍때리고 앉아있지를 못한다. 시간과 사투를 벌이던 전반생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 느낌이다. 할 일이든, 하고 싶은 일이든 뭔가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 나 자신에게 묻는다.
'너 대체 왜 그렇게 바쁜데?'
지금은 내 인생의 하프타임. 시간을 두고 새길을 걷기 위해 내게 부여한 시간이다. 아직 은퇴라는 선물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우왕좌왕하지만 보채지 말고 타박도 하지 말자. 오십여 년의 생활방식을 어떻게 쉽게 바꿀 수 있겠는가.
먼저 '은퇴 활주로'에 도착해 돌아보니 남편 역시 은퇴를 향해 서서히 고도를 낮추며 착륙을 준비하고 있다. 올해 6월부터 남편은 주 40시간 근무 시간을 30시간으로 축소했다. 나는 지금의 하프타임 동안 그간의 생활 리듬을 바꾸는 훈련을 하며 은퇴가 멀잖은 남편을 기다린다. 그의 소프트랜딩을 있는 힘껏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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