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아직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을 얻지 못했다.
한 문장을 세 번 정독해도 이해가 안 되면 나의 이해력이 부족한 게 아니다. 둘 중 하나다. 저자도 모르거나, 읽는 이의 입장에서 쓰지 않았거나. 반년이 지나도록 답을 얻지 못한 질문이라면 역시 둘 중 하나다. 답이 없거나, 답하는 자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은 뭉뚱그린 질문이거나.
이제 질문을 다시 들여다볼 때이다.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질문을 더 쪼개 보자.
은퇴 후 나는
1. 무엇을 할 수 있을까?
2. 무엇을 하면 좋을까?
3. 무엇을 하고 싶은가?
하나의 물음에 세 질문이 숨어있다. 이러니 답을 못 찾은 것이다.
첫 번째 질문은 내가 잘하는 것을 은퇴 후에 하는 경우다. 내가 잘하는 것? 많다. 분석, 계획, 끈기, 추진력 같은 소프트 스킬 외에도 지금껏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며 쌓아온 지식과 경험은 최고다. 그럼, 이걸 은퇴 후에도 계속하고 싶냐고? 오우 노우~
잘하려고 부단히 노력했고 잘해서 즐거웠지만, 겹겹이 쌓이는 스트레스가 독이 되어 한밤중에 나는 쓰러졌다. 취미나 재능기부 차원에서 스트레스를 최소화하며 일할 수도 있지만, 소프트웨어 개발 세계는 빠르게 변하고 공부량도 꽤 많다. 대충 이 세계에 발 담그고 할 일이 아니라는 거다. 내 성격상 대충 하지도 않을 테니 스트레스가 또다시 내 숨통을 조여올 것이다. 더는 나를 넘어뜨리는 스트레스를 이고 지며 살고 싶지 않다.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들여다보자. 나이 들어 배워두면 좋을 것들로 뭐가 있을까? 부모님 연로하시고 형제들도 나이 들어가니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 볼까? 중국어 잘하는 남편과 '지구 밖으로 행군'하려면 중국어를 배워둬야 하지 않을까? 수지침과 응급처치법을 배워보면 어떨까? 흠... 모두 유용한 지식이지만 열정이 생기지 않는다.
세 번째 질문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사는 삶이다. 내가 잘하는 것이 하고 싶은 것이고, 은퇴 후 삶에 이득이 되면 좋으련만 세 가지를 버무려놓으면 또다시 원점으로 돌아간다. 잘하는 것과 유용한 것은 제쳐두고 황당무계하더라도 내가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물어야 한다.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을 생각할 때는 뿌연 안갯속 같던 머릿속이 하고 싶은 것이 뭐냐고 물으니 비 온 후 하늘처럼 파랗게 갠다. 은퇴 후 한국에서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모든 서울 지하철 노선을 타보는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서울을 속속들이 들여다보고 싶다. 내가 태어나 자란 곳인데 나는 서울의 서너 귀퉁이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서울의 모든 둘레길을 걸은 후에는 지경을 넓혀 전국의 둘레길과 산성길, 그리고 호숫길에서 땅 밟기를 하고 싶다. 독일에서 현란하게 좌우 수신호 주며 타던 실력으로 자전거 전국 일주도 하고 싶다. 제주 1년 살기, 동해 1년 살기, 산골 1년 살기 또한, 해보고 싶다. 영상 편집을 배워 언니가 온갖 꽃으로 가꾸는 정원을 계절마다 기록해주고 싶다. 나의 엄마 고 권사님은 성가대를 강권하시겠지만, 나는 문화센터의 합창단에서 가요를 부르고 싶다. 어느 날 최백호의 '낭만에 대하여'를 들으며 느꼈던 전율은 지금도 생생하다. 이 노래는 어릴 적부터 찬송가로 차곡차곡 채워진 나의 측두엽에 신세계를 보여줬다. 한정식 먹다가 처음 맛본 소머리국밥이랄까. 최백호 콘서트에 가서 내 또래 사람들 옆에 앉아 양손 치켜들고 좌우로 리듬 타며 '낭만에 대하여'를 떼창으로 부르고 싶다. 그전에 도라지 위스키 맛부터 봐야지. 세상에나, 이렇게 하고 싶은 게 많다.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생기가 돌고 심장이 팔딱거린다. 쥐어짜지 않아도 머릿속에서 술술 흘러나온다. 하고 싶은 일들이 적힌 포스트잇들로 방 한쪽 면이 단숨에 도배된다. 이쯤 되면 하고 싶은 것을 하며 사는 것이 맞다.
나는 은퇴 후에는 하고 싶은 것들을, 좋아하는 것들을 하기로 한다. 나의 이런 생각에 쐐기를 박는 글을 얼마 전에 읽었다.
무엇을 하고 놀 때 더 즐거운지, 자신에게 자꾸 물어보세요. 인생을 사는 즐거움은 재미에서 나옵니다. '나는 무엇을 할 때 즐거운가?' 그것을 찾아내는 것이 진짜 공부입니다. 100세 시대, 우리는 아주아주 긴 시간 놀아야 하니까요, 지금 이 순간 즐거운 놀이를 찾아 열심히 놀아봅시다.
≪매일 아침 써봤니?≫(김민식 저 / 위즈덤하우스)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에 오래전 내가 찾은 답인 '하나님께 감사하고 즐겁게 살자.'와 맞닿아있다. 김민식 작가의 말대로 일이든 봉사든 즐거워야 지치지 않는다. 생각대로 되지 않아도 과정을 부인하지 않는다. 하는 동안 즐거웠으니까. 헛되다고 자책하지 않는다. 지혜꾼 솔로몬 왕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던가.
사람이 자기 일에 즐거워하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나니
≪전도서 3:22≫
그러고 보니 '은퇴 후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은퇴 후 어떻게 살 것인가?'가 적확한 질문이었나 보다. 하고 싶은 것들을 하나씩 해보자. 나의 전문 분야와는 거리가 멀고 생뚱맞아도 익숙하지 않다며 미리 포기하지 말자. 어차피 은퇴 후 삶은 내게도 처음 들어서는 길이다. 그 길에서는 더 이상 조바심 낼 필요가 없고 냅다 앞으로만 내달리지 않아도 된다. 쉬엄쉬엄 주위도 둘러보자. 하고 싶은 일을 하다가 즐거우면 잘해보자. 즐거운 놀이를 찾아 재밌게 살아보자. 내가 즐거워야 주위에 선한 영향력도 끼칠 수 있다. 'Happy wife, happy life!'라고 말하는 내 남편의 행복한 삶이 나의 즐거움에 기인하니 나는 더더욱 즐겁게 놀아야겠다. 은퇴 후 재밌을 나의 삶을 열렬히 응원한다. 이번에는 홧팅 말고 야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