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발적 은퇴를 한 지 두 달이 넘어선다.
두 달 남짓 동안 늘어지게 낮잠을 잔 적이 없으며 밤새워 넷플릭스로 한국 드라마를 본 적 또한 없다. 사실 나는 넷플릭스 계정이 없다. 집에 TV도 없다.
남편은 아침 6시, 나는 그보다 30분 늦게 일어난다. 먼저 잠에서 깬 남편은 과일과 오트밀을 꺼내 조리대 위에 올려놓고 달걀 두 알에 구멍을 뚫어놓는다. 식탁을 정리하고 샤워를 한 후에 나를 깨운다. 나는 씻고 부엌으로 가 과일을 잘게 썰고 오트밀을 우유에 불린다. 불린 오트밀에 채 썬 과일과 잘게 부순 호두를 섞는다. 달걀은 6분 반숙으로 익힌다. 이 스위스식 시리얼과 반숙 달걀이 우리의 아침밥이다. 내가 아침을 준비하는 동안 남편은 30분 정도 산책을 다녀온다. 집에서 몇 걸음만 걸으면 자연보호구역이다. 산책에서 돌아온 남편과 아침 식사를 마치면 8시쯤 된다. 남편은 자신의 서재에서 재택근무를, 나는 내 서재에서 나의 하루를 시작한다.
남편의 아침 산책과 공들인 아침 밥상은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풍경이었다. 재택근무를 하기 전에 남편은 교통 체증이 심한 루르(Ruhr) 공업지대의 고속도로를 운전해 출근했고, 나는 아침 회의에 늦지 않으려고 부랴부랴 집을 나섰다. 재택근무로 달라진 것은 별로 없었다. 우리는 늘 시간에 쫓겼고 마주 앉아 밥 먹을 시간도 없었다. 주말에서야 느긋한 아침을 보낼 수 있었다.
은퇴하고 제일 하고 싶은 것은, 남편과 마주보고 같이 아침밥을 먹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 부부는 둘이서 준비한 아침 밥상을 마주하고 감사 기도로 하루를 연다. 남편이 재택근무를 마치는 오후 5시면 나 역시 나의 하루를 마감한다. 이후는 남편과 함께하는 시간이다.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나의 하루에는 계획이 없다. 내 서재의 한쪽 벽에는 'Todo'라 쓰인 A6 규격의 녹색 포스트잇이 붙어있다. 그 아래로 노란색의 여러 작은 포스트잇들이 우선순위에 따라 달려있다. 노란 포스트잇 하나당 할 일 혹은 하고 싶은 일이 적혀있다. 여러 항목을 하나의 포스트잇에 적지 않는다. 매일 포스트잇의 우선순위를 확인하고 재배치한 후, 맨 위에 달린 포스트잇에 파란 동그라미 스티커를 붙인다. 바로 오늘 내가 할 일이다.
일이 끝나면 날짜를 적고 파란 스티커를 떼어낸 후 녹색의 A6 'Done' 포스트잇 아래로 옮겨 붙인다. 내가 회사에서 일했던 방식인 스크럼(Scrum)을 약간 변형해서 적용한 것이다. 스크럼에 따르면 'Todo(할 일)'와 'Done(완료)' 사이에는 'In Process(처리 중)'가 있어야 하지만 나는 대용으로 엄지손톱만 한 스티커를 사용한다. 하루치 일감이면 노란 포스트잇의 오른쪽 위에 파란 스티커를 붙이고 여러 날이 걸리면 빨간 동그라미 스티커를 붙인다.
Todo 포스트잇에는 거창한 뭔가가 쓰여 있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다림질하기', '중고 사이트에서 OOO 팔기', '기타 줄 갈기' 등 일상의 할 일들이다. 일을 마치고 Done 밑으로 모아놓으면 성취감이 생기고, 저녁쯤에는 마무리한 일 중심으로 하루를 다시 들여다볼 수 있어 좋다.
나는 주머니에 메모지와 펜을 늘 지니고 있다가 수시로 메모한다. 메모지에 적어둔 내용은 한꺼번에 노란 포스트잇으로 옮겨 쓴 후 우선순위를 매긴다.
나는 오늘 무엇을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굳이 결심이라는 것도 하지 않는다. 은퇴 후 많은 시간을 결심과 계획으로 채운다면 작심삼일을 반복하다 지쳐 나자빠질 거다. 나는 이른 은퇴를 후회할지도 모른다.
퇴사한 회사에서 매일 9시면 회의가 있었다. 한 동료가 늘 5분 늦게 왔다. 딸내미를 유치원에 데려다주고 오느라 늦었다고. 고속도로가 막혔다고. 항상 이유는 있었다. 팀은 그 동료를 위해 아침 회의를 10분 늦췄다. 어땠을까? 9시 10분 정각에 회의에 참석했을까? 그 동료는 또다시 5분 늦은 9시 15분에 사무실로 들어섰다. 재택근무를 한 후로는 막히는 고속도로를 탈 필요가 없는데도 5분 늦게 화상 회의에 나타났다.
사람이 안 변하는 것은 습관을 바꾸지 않기 때문이다. 내 동료가 5분 늦는 것은 나쁜 습관 탓이다. 나는 아주 많이 약속에 늦은 사람에게 화부터 내지 않는다. 일단 이유를 들어본다. 왜냐면 많이 늦으면 분명 이유가 있을 테고, 당사자는 더 마음을 졸였을 테니까. 하지만 납득할만한 이유 없이 늦는 사람은 나에게서 손절 1순위이다. 상습적으로 5분 늦는 사람에게서는 변명 따위 들을 마음조차 없다. 나쁜 습관을 고치려 하지 않는 이들과도 가까이 지내고 싶지 않다.
나는 인생 2막에서 할 일을 아직 찾지 못했다. 소프트웨어 개발자로 할 수 있는 것들은 꽤 많다. Siri 닮은 내 개인비서를 만들어 볼까? 잘 알려지지 않은 독일 여행지와 맛집에 관한 정보를 찾아주는 서비스를 만들어도 괜찮을 텐데.
하고 싶은 일도 많다. 인문학 강의를 오프라인으로 듣고 싶다. 최백호 콘서트에 가고 싶다. 남편과 요리학원에서 한국 요리를 배우고 싶다. 그리고 둘이서 대한민국 방방곡곡을 다니고 싶다. 서울의 모든 지하철 노선을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타고 다니고 싶다. 기타 학원에 등록해서 지지부진한 실력을 갈고닦아 떼창 반주를 하고 싶다. 언니랑 새벽에 줄 서 들어갔던 정독 도서관에서 우동도 먹고 싶다. 형제들과 불 피워 고기 굽고 고구마 먹으며 불멍하고 싶다. 한국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관심 역시 빠뜨릴 수 없다.
그러고 보니 할 수 있는 일도, 하고 싶은 것도 참 많다. 하지만 이 일회적인 것들을 지속성을 가진 '일'이라는 파이프로 연결하기가 쉽지 않다. 어쩌면 연결하려는 시도 자체가 헛발질은 아닐까? 잘 모르겠다. 은퇴는 나에게 처음이라.
모르고 막히면 다른 각도로 접근하면 된다. 나는 후반생에서 할 일 찾는 것을 잠시 미뤄두고 좋은 습관을 기르기로 한다. 결심이 아닌 좋은 습관을 토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하고 싶은 것을 하나씩 하다 보면 '일'이라는 파이프에 닿아있지 않을까?
일찍 일어나 정성 들여 만든 아침밥을 먹고, 정해진 시간에 나의 하루를 시작하며, 한쪽 벽을 포스트잇으로 도배하는 것은 은퇴 후 넘쳐나는 시간을 다스리는 습관을 기르기 위해서다. 본격적인 인생 2막이 시작되기 전, 지금의 하프타임 동안 나는 좋은 습관의 근육을 키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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