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반전 이야기

박사학위를 하다

선한 부자-이현주 2022. 2. 9. 19:30

1998년 4월, 나는 독일 본(Bonn) 대학교에서 전산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했다.

나는 '박사학위를 받았다.'라고 하지 않는다. 누가 내게 거저 줘서 받은 것이 아니니까.

'공부를 마쳤다.'라고도 하지 않는다. 공부는 끝이 없으니까.

 

ⓒ 2022. 이현주, Bonn 대학교/Germany

 

대략 설명하자면, 전산언어학은 사람의 글(Text)과 말(Speech)을 컴퓨터가 이해하여 출력값을 다시 자연언어로 변환하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잘 알려진 구글의 번역기, 애플의 Siri 등이 이 학문의 대표적인 결과물이다. 자연언어 처리(Natural Language Processing)는 인공지능의 핵심 기능 중 하나로 현재는 컴퓨터공학의 세부 분야에 속하지만, 내가 공부하던 1990년대 본 대학교에서는 하나의 독립된 학과에서 다뤄졌다. 나는 전산언어학을 공부하기 위해 컴퓨터공학과 독어학을 부전공으로 선택했다.

 

나는 한국외국어대학교에서 독일어를 전공했다. 그래서 부전공으로 택한 독어학은 낯설지 않았다. 문제는 전공인 전산언어학과 부전공인 컴퓨터공학이었다. 전공 내용은 생소했고, 나는 컴퓨터에 대해 아는 바가 거의 없었다. 유학 오기 전에 8인치 플로피 디스켓으로 부팅한 386 컴퓨터로 석사 논문을 쓰고 Arity Prolog로 문자열을 처리하는 짧은 코드를 만들어 봤을 뿐이었다. 컴퓨터공학에 관한 강의 한번 들어본 적이 없었고, 어떤 알고리즘들이 있으며 컴파일러는 뭐 하는 물건인지도 모른 채 덥석 전산언어학을 공부하러 독일로 왔다. 수업은 독일어로, 관련 서적은 대부분 영어로, 내용은 낯설고, 컴퓨터에 대한 지식은 미미했으니 이보다 더 용감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첫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본 대학교 렌더스(Prof. W. Lenders) 교수(훗날 내 박사논문 지도교수다)를 찾아갔다. 당신에게서 논문 지도를 받고 싶으니 나를 박사과정으로 받아달라며 포부에 찬 연구 계획(Exposé)을 설명했다. 나의 언감생심을 끝까지 들은 렌더스 교수가 한 말은 '바닥부터'였다. 전공과 부전공의 모든 수업에 참여해 시험을 치르고, 세미나에서 발표도 한 후에 논문 쓸 자격이 되면 다시 오라고 했다. 강호 무림의 무공 높은 사부처럼 렌더스 교수는 내 일천한 지식 상태를 꿰뚫어 보았다. 렌더스 교수에게서 퇴짜를 받은 후 나는 '물 긷기'와 '장작 패기'와 같은 기초과정부터 시작하기로 마음먹었다.

 

당시 독일 대학의 학생들은 초원에 풀어놓은 목자 없는 양 떼 같았다. 어느 학년이 어느 과목을 이수해야 한다고 정해놓은 것도 없고, 언제 학과 과정을 마쳐야 한다는 규정 또한 없었다. 아예 '학년'이라는 말 자체가 없었다. 이수 과목을 위한 조건만 있었다. 예를 들면, 고급과정에 속한 Hauptseminar에 참석하려면 기초과정의 Vorlesung과 Proseminar를 이수해야 했다. 학생들은 어느 수업에 무슨 조건이 있는지 스스로 파악해서 시간표를 짰다. 한 학기에 몇 과목을 이수할지도 전적으로 학생 혼자 결정했다. 한 과목에서 재시험까지 탈락하면 과를 바꿔야 하는 제약 때문에 이수 과목을 무리하게 늘릴 수도 없었다. 이러다 보니 학과마다 늙수그레한 학생들이 적지 않았고, 심지어 종교학 수업에는 장발의 흰머리로 젊은 교수를 가르치려 드는 '할배 학생'도 있었다. 대학 등록금은 공짜에다 과목 이수에 대한 연수 제한도 없었던 독일 대학에서 심심찮게 볼 수 있는 풍경이었다.

 

내가 기초부터 최고급 과정들을 모두 이수하고 렌더스 교수를 다시 찾았을 때는 그 후로 3년이 흐른 뒤였다. '물 긷고 마당 쓰느라' 굳은살 박인 두 손바닥을 보여주듯 전공과 두 개의 부전공에서 이수한 증명서들을 좌르르 펼쳐 보였다.

"이제 논문 쓸 자격이 되나요?"

질문에 노교수는 내가 가져온 것들을 흘낏 쳐다보고는 "Ja(네)"라고 답했다.

'그냥 Ja? 아니 뭐가 이렇게 간단해요? 그러니까 제가 가져온 것들 좀 자세히 보세요.'라고 말하듯 서류들을 주섬주섬 렌더스 교수 앞으로 내밀자, "알아요. 그러니까 다음에는 연구계획서를 가져오세요."라며 나의 애타는 손놀림을 멈춰 세웠다. 뭘 어떻게 안다는 거지? 하긴 렌더스 교수의 수업은 턱 밑에 앉아 다 듣고 발표했으니 전공과목 이수는 대충 아실 테고, 그럼 독어학은? 컴퓨터공학은? 하~ 보지 않은 것도 아는 당신은 진정 강호의 고수십니다.

 

새롭게 연구 계획서를 제출한 후 2년 정도 렌더스 교수의 지도를 받아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나는 박사학위를 '받으러' 독일로 왔으나 내 지도교수는 나에게 학위를 '하게' 했다. 장작 팰 줄도 모르면서 장풍 날리길 바랐던 풋내기에게 기초를 다지게 했고 학자로 홀로 설 수 있게 했다.

 

논문을 쓰는 동안 렌더스 교수는 철저히 제삼자의 위치를 유지했다. 독일에서는 감 놔라! 대추 놔라 식의 '친절한' 논문지도는 하지 않는다. 연구는 내가 하고 렌더스 교수는 그 결과물에 대해 자신의 의견을 내는 정도의 역할을 했다. 사실 독일에서 지도교수의 역할과 결정권은 막강하다. 까다롭기 그지없는 독일의 대학 행정도 지도교수의 결정에는 토를 달지 않는다. 한국에서 독일어를 전공한 내가 전산언어학 박사과정에서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렌더스 교수의 독자적 승낙 덕분이었다.

 

내 박사학위 연구 논문(Dissertation)은 두 명의 심사위원에게서 라틴어로 'valde laudabilis' 점수를 받았다. 독일어로 옮기면 sehr gut이고 우리말로는 매우 우수 정도 되겠다.

 

전산언어학으로 박사학위를 하려면 논문 제출 외에도 전공과 두 부전공에서 구두시험을 치러야 했다. 이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해서 대학에 제출해야 공식적으로 박사학위가 수여됐다. 이 세 과정 중에 나는 겨우 '연구 논문 제출'이라는 산 하나를 넘었을 뿐이었다.

 

논문을 제출한 후 나는 숨 고를 틈 없이 다음 단계인 구두시험(Rigorosum)을 준비했다. 박사학위증에는 논문 점수뿐 아니라 구두시험 점수 역시 기재되기 때문에 시험은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논문 심사의 주심은 자동으로 지도교수였지만, 부심은 내가 정할 수 있었다. 구두시험 역시 누구에게 치를지 내가 결정했다. 시험관으로 염두에 두었던 전공과 부전공 교수들을 일일이 찾아가 승낙을 받고 시험 일정을 받아 대학 행정처(Dekanat)에 제출했다. 1998년 1월 중순쯤이었다.

 

나는 1998년 4월 28일과 29일 이틀에 걸쳐 세 개의 구두시험을 치렀다. 시험 날짜가 정해지자 비상식량만 챙겨놓고, 다섯 평도 채 안 되는 기숙사 방에 틀어박혀 시험준비를 했다. 구두시험을 망치면 몇 년간의 수고가 물거품이 될 수 있으니까. 극도의 긴장으로 시험 일주일 전에는 물 한 모금만 마셔도 설사를 했다. 논문 제출 후 석 달 동안 시험 준비를 했지만 부족한 느낌이었다. 시험 날짜가 다가오자 잡념이 머릿속에서 독가스처럼 퍼져나갔다. '만약 준비하지 않은 질문을 받으면 어쩌지... 시험관이 골탕을 먹이면 어쩌지... (이런 경우들이 전설처럼 대학가에 퍼져있었다) 만약... 만약... 만약 질문조차 못 알아들으면 어쩌지!' 하는 생각에 이르러서는 책조차 펼 수가 없었다. 1992년 가을, 일천한 지식으로 독일로 왔던 배포는 온데간데없이 나는 퍼렇게 질려 있었다. 중압감 때문에 아무리 읽어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는 책을 덮고 성경 여호수아서를 읽기 시작했다. "너와 함께하니 두려워 말라."는 말씀으로 마음의 평화를 얻고 '만약' 잡념을 몰아낼 수 있었다.

 

내 평생에 선하신 하나님을 의지하며 1998년 4월 28일 화요일 오후 6시에 첫 구두시험으로 독어학 시험을 치렀다. 독어학 시험은 발렌츠(Valenz) 문법의 대가인 엥겔(Prof. U. Engel) 교수에게서 보았다. 엥겔 교수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질문의 난도를 높여갔다. 마지막 질문은 상당히 복잡한 문장을 발렌츠 문법으로 분석하는 것이었다. 시험 준비하면서 분명 이와 비슷한 문장을 분석해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답이 생각나지 않았다. 입은 마르고 손은 바르르 떨렸다. 뭐였더라... 쓰고 고치길 반복하며 기억해내려고 애쓰는 나에게 엥겔 교수가 말했다.

"당신은 분명히 답을 알고 있습니다. 너무 긴장해서 기억이 안 나는 겁니다. 당신은 할 수 있어요!"

흡사 완주를 눈앞에 둔 기진맥진한 마라톤 선수에게 조금만 더 힘내라고 안타깝게 응원하는 동네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 간절함이 닿았는지 나는 답을 떠올려 일사천리로 분석해냈다. 노교수가 나보다 더 기뻐했던 것 같다.

 

시험이 끝나고 교수 집무실 앞에서 잠시 대기하고 있는 동안 엥겔 교수는 내가 대학 행정처에서 받아온 서류에 시험 점수를 기재하고 도장과 서명으로 봉했다. 시험 점수가 적힌 서류는 내가 시험 당일 직접 대학 행정처에 제출해야 했다. 잠시 후 우리는 다시 마주 앉았다. 엥겔 교수가 물었다.

"혹시 논문 점수를 아십니까?"

"네, sehr gut입니다."

봉인된 서류를 내게 건네며 엥겔 교수가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 또한 일어났다. 나에게 정중히 악수를 청하며 엥겔 교수가 말을 이었다.

"시험 점수로 나 역시 sehr gut을 줍니다. 외국 학생이 이런 성과를 거둔 것에 자부심을 가지세요."

지금도 이 순간을 떠올리면 뭉클하다.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을 무슨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마음 졸인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아서만은 아니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무시를 가다듬고 가만히 내 눈을 들여다보며 했던 노교수의 그 말이 고단하고 외로웠던 나의 유학 생활을 토닥토닥 다독이는 듯했다.

 

전공과 부전공인 컴퓨터공학 시험은 다음 날인 29일 수요일 오후 1시 30분과 6시에 치렀다. 첫 시험에 크게 용기를 얻어 나는 구두시험 점수로 라틴어인 'magna cum laude'를 받았다. 독일어로 sehr gut이고, 우리말로는 '참 잘했어요' 되겠다.

 

이후 논문을 책으로 출판하고 나는 독일에서 박사학위를 했다. 당시 내 나이 만 서른이었고 독일로 공부하러 온 지 5년 6개월 만에 맺은 결실이었다.

 

ⓒ 2022. 이현주, 구두시험 직후 Bonn 대학 행정처에서 받은 내 박사논문 점수와 구두시험 점수가 적힌 메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