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주문, 그리고 몇 가지 단상
엊그제 한국에서 탈 차를 주문했다.

새 차 출고 기간이 1년 넘어가는 것들도 있으니 서둘러야 한다는 말에 10만 원을 내고 덥석 주문을 넣었다. 지금으로부터 16개월 후, 2024년 2월에나 만날 수 있으니 차보다 내가 먼저 파주에 도착한다.
16개월 이상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놀라 도나우 동네 자동차 판매점을 찾았다. 내가 주문한 차종은 독일에서도 8~10개월을 기다려야 한단다. BMW 전기차의 출고 기간은 18개월이란다. 글로벌하게 이게 대체 뭔 난리인지.
처음부터 새 차만을 고집한 것은 아니다. 중고차에 관해 묻자 한국에 있는 지인들 모두가 손을 내저었다. 토박이들이 말리는 데는 이유가 있겠지. 나는 새 차를 사기로 했다. 독일에서 30년째 사는 나는 국산 차를 잘 모른다. 지인들에게 물으니 현대 그랜저를 가장 많이 추천해줬다. 그랜저 추천사 중 이 말이 기억에 남는다.
"그 나이면 그랜저 정도는 타야 해요. 게다가 외국인이 작은 차 타면 우습게 볼 수도 있어요."
나이 오십 넘었고, 게다가 독일인 남편을 위해서라도 그랜저급의 중형 세단을 타 줘야 한다는 말이다. 흠... 전혀 마음에 와닿지 않는 조언이다.
안 되겠다, 어떤 차가 필요한지 리스트를 만들어 보자.
- 국산 차를 사자. 부품 구하기 쉽고 저렴할 테니까.
- 반도체 만들다가, 건설하다가 차까지 파는 회사 말고, 수십 년간 차 만드는 데 주력한 회사를 선택하자.
- SUV를 사자. 남편이 키가 크고 종종 디스크로 고생하니, 넓고 높은 운전석이 낫겠지.
- 독일의 고속도로처럼 속도 무제한으로 다닐 일은 없을 테니 마력보다는 연비에 중점을 두자.
- 아직 보편화가 안 된 전기차는 사지 말자.
- 차량 이용 인원은 나와 남편, 두 사람일 테니 굳이 큰 차를 살 필요는 없다.
- 그렇다고 경차를 사지는 말자. 안전도 중요하니까.
- 운전/주차/안전에 도움을 주는 옵션은 추가하자.
- 수월한 관리와 정비를 위해 집 근처에 직영 서비스 센터가 있으면 nice to have!
필요에 따라 가지치기한 후, 나는 기아 스포티지 1.6 하이브리드를 주문했다. 10년 정도 남편과 나의 튼튼한 발이 돼주면 좋겠다.
내년이면 아예 들어와 살 곳이라 그랬는지, 올 추석 한국에 갔을 때 도로 위 차종, 교통질서, 운전 방식 등을 유심히 살펴 독일과 비교해 보았다. 한국에서 수동 기어 자동차는 이제 완전히 사라진 듯했고, 연식이 얼마 되지 않은 큰 차들이 거리에 많이 보였으며, 거의 모든 차에 짙은 선팅이 돼 있었다. 동생에게 선팅 이유를 물었더니, 여름에 햇볕이 너무 강해서란다. 독일의 여름 볕 역시 만만치 않지만, 선팅한 차들은 아주 드물다. 2020년도 mobile.de가 1,062명에게 실시한 설문 조사에서 독일 응답자 72%가 수동 기어 자동차를 보유하고 있다고 답했다. 현재 독일에서 내 차도 스틱으로 기어를 변경한다.
한국에 회전 로터리가 많이 생겨난 점도 눈에 띄는 변화였다. 그런데 회전 로터리에서 진입과 진출은 혼돈, 아니 공포 그 자체였다. 회전 로터리 안에 있는 차량이 우선순위를 갖지만, 진입하는 차 때문에 로터리 안에 있는 차들이 멈춰서야 했다. 독일에서 회전 로터리의 차량 우선순위는 한국과 같다. 다른 점은 진입 시에 깜빡이를 켜면 안 된다. 진출할 때만 우측 깜빡이를 켠다.
독일의 국도나 고속도로에서 1차선은 차선 변경용이고, 오른쪽 차선에서의 추월은 금지다. 한국에는 이런 개념이 없는 듯했다. 1차선에서 저속 운행하는 승용차를 뒤따르던 트럭이 차선을 바꿔 오른쪽에서 추월하는 것을 종종 목격했다. 아찔했다. 게다가 한국의 횡단보도는 발을 내딛기 참 무서운 곳이었다. 횡단보도에서 '나 건너가고 싶어요'라고 신호 팍팍 줘도, 쌩쌩 지나가 버렸다. 수박씨~발라 먹고 싶게 하는 운전자들이 꽤 많았다.
골목길에서 차량 우선순위도 엉망이었다. 독일에서 신호등 없고 우선순위에 대한 안내판도 없을 경우, 오른쪽 도로에서 접근하는 차가 우선순위를 갖는다. 한국에서는 먼저 들이대는 차가 우선이었다. 투덜거리는 내게 언니가 한마디 했다.
"융통성이 규칙보다 나을 때가 있어."
문제는 융통성이 규칙을 삼켜버려 더 이상 규칙이 작동할 수 없다는 데 있다. 융통성은 규칙이 살아있어야 빛을 발한다. 규칙 없는 융통성은 카오스일 뿐이다.
차도 주문했고, 독일 운전 면허증으로 국내 운전 면허증은 별 어려움 없이 발급받을 수 있다니 또 한발 한국으로 다가선 느낌이다. 귀국 후 도로 주행 교육을 받겠지만, 두 달 전 목격한 '융통성을 빙자한 카오스'가 마음에 걸린다. 나는, '훌륭한 질서는 모든 것의 기초이다'라고 생각하는 ESTJ 유형이다. 어쩐다, 융통성 넘치는 한국에서 운전하다가 맘고생 할 일이 적잖을 듯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