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전히 낯설다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고 있어도 도저히 적응 안 되는 몇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사우나다. 독일의 남녀혼탕 사우나에 대한 경험담을 적은 글들이 적잖지만, 내 경험은 최소 이불 킥 30년짜리다.
신혼 초에 살았던 마을의 옆 동네에는 야외 온천탕과 사우나를 갖춘 온천이 있었다. 눈 내리던 겨울에 남편과 함께 처음 그 온천에 갔다. 송이송이 눈 떨어지는 야외 온천만 즐기면 좋았을걸... 뜨겁고 건조한 공기로 땀을 뺀 후 야외에 설치된 얼음통에 몸을 담그면 환상적이라는 남편의 꼬드김에, 다 안 벗고 타월로 가리면 된다는 말에 나는 사우나를 해보기로 했다. 게다가 나는 고도 근시라서 안경 없이는 보이는 게 없다.
사우나 전용공간으로 들어서는 순간 나는 식겁했다. 입구에서부터 독일식 뽕짝 가락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오색찬란한 만국기가 휘날리며 알록달록한 풍선들로 장식한 바에서는 70+ 시니어들이 홀딱 벗은 채로 칵테일을 들고 춤을 추고 있었다. 여긴 어디? 나는 왜 여기에? 그날이 무슨 날이라 온천에서 이벤트를 연 거란다. 후딱 안경을 벗고 야외 사우나실로 내달렸다.
다행히 다들 파티에 여념이 없어, 3층 목조 계단으로 지어진 대형 사우나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맨 꼭대기에 앉아 은은히 퍼지는 편백 향을 맡으며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있을 즈음, 사람들이 우르르 몰려들기 시작했다. 두어 시간에 한 번씩 온천 직원이 들어와서 달궈진 불판에 물을 뿌려 습하고 뜨거운 증기를 분산시켜주는데, 그 특별 서비스를 받으려고 파티하다 말고 몰려온 것이었다.
족히 스무 명이 넘는 벌거벗은 사람들이 전깃줄에 앉은 참새떼처럼 촘촘히 자리를 잡자 내 머릿속에는 '탈출' 알람이 울렸다. 몸에 둘렀던 타월을 바짝 움켜쥐고 계단을 내려갔다. 아뿔싸, 안경 없이 허둥대다 마지막 계단을 보지 못한 채 나는 바닥에 그대로 철퍼덕 엎어져 버렸다. 빛의 속도로 뛰어 내려온 남편의 부축을 받아 밖으로 나오자 사람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으깨져 피가 나고 부어오른 무릎을 보며 불판 위로 떨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는 둥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제발 좀 저리 가주세요!'라고 외칠 수도 없고, 말할 수 없는 창피함과 나를 에워싼 벌거벗은 사람들 때문에 나는 환장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내가 사우나에 다시 오면 오 씨로 성을 간다!'
나의 사우나 악몽을 되살린 사람은 우리 동네 아이스크림 가게 아줌마였다. 한겨울에 겪은 창피함과 민망함이 잦아든 그해 여름에 남편과 시내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진열대에서 아이스크림을 골라 계산을 마치자 가게 아줌마가 물었다.
"무릎은 어때요?"
"네?"
"올 초에 온천에서 무릎 다쳤잖아요. 지금은 다 나았어요?"
"!!"
그날 거기에 나를 둘러싼 벌거벗은 사람들 중에 이 아줌마가 있었나 보다. 안경 없이 뵈는 게 없던 나는 아무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이 아줌마는 나를 알아봤다. 아줌마의 살가운 인사를 마지막으로 나는 그 아이스크림 가게에 다시는 가지 않았다.
나의 온천 경험담은 여기서 끝나야 했다. 사우나 사건 후로 세월이 많이 지난 어느 해 가을, 온천이 유명한 곳으로 휴가를 떠났다. 오후 늦게 들어간 온천에서 남편은 사우나를 하러 갔고 나는 야외 온천탕에서 혼자 놀고 있었다. 젖은 낙엽들이 풍기는 가을 향을 즐기며 온천욕을 하고 있는데 물속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수영복을 벗어 난간으로 던지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벗는 건데! 또 파티하려는 거야?'
경악했지만 두 번째 겪는 일이고, 그사이 나는 새댁에서 담력이 조금 세진 아줌마가 되어있었다. 게다가 안경 없이는 보이지도 않으니 무시하고 계속 온천욕을 하기로 했다. 그때 내 머리 위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수영복 벗으세요!"
물속에서 올려다보니 짧은 티셔츠에 반바지를 입은 온천 직원이 서 있었다.
"여기는 수영복을 입어야 하는 야외 온천탕인데 왜 옷을 벗어야 하죠?"
"오늘 오후 6시부터 나체 온천욕입니다. 입구에 공지해놨는데 못 보셨나요?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벗거나 나가시거나."
"....."
그래서 6시가 되자마자 물속에 있던 사람들이 수영복을 벗어 던졌던 거였다. 홀딱 벗은 사람들이 나의 결정을 숨죽여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나는 수영복 따위 훌러덩 벗어서 던져버리...지 못하고 야외 온천탕을 떠났다. 아니 쫓겨났다.
나체로 혼성 사우나 하는 것에 기겁하는 독일 여자들도 있다. 다만 자기 몸을 보이고 싶지 않을 뿐이지 타인의 온천 스타일에 딴죽 걸 마음은 없는 듯하다. 사우나에 별 반감이 없는 남편은 음습한 의도로 사우나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라 한다. 건강에 좋고 몸 개운해지는 이 좋은 것을 안 할 이유가 없단다. 담백한 남편의 설명에 오히려 내가 뻘쭘해진다. 그런데도 나는 혼성의 나체가 허락되는 공간에서 스스럼없이 옷을 벗는 문화가 여전히 낯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