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보다 가계부
꽃보다 남자, 일기보다 가계부다.
일기는 드문드문 쓰지만 가계부는 신혼 초부터 매일 쓰고 있다. 가계부는 아날로그과 디지털, 두 가지 방식으로 작성한다. 한 해가 시작되기 전에 내가 직접 만든 열두 달 치 가계부를 출력해놓는다. 수입과 지출이 생길 때마다 종이 가계부에 빠짐없이 기록한다. 매달 마지막 날에는 종이 가계부에 쓴 한 달 치 내용을 엑셀로 만든 디지털 가계부에 옮겨 쓴다. 가계부의 전산화는 통계를 위해서다. 열두 칸이 빼곡히 채워지는 연말에는 일 년 수입과 지출을 항목별로 한눈에 볼 수 있다.
내가 24년째 가계부를 쓰는 이유는 이렇다.
첫째, 저축을 체계화할 수 있다. 한 달 생활비를 예측할 수 있어서, 저축 먼저 하고 나머지 돈으로 생활하는 것을 가능케 한다. 매월 1일, 나는 수입에서 한 달 생활비만 입출금 통장에 남겨놓고 나머지는 저축통장으로 이체한다. 입출금 통장에 있는 돈은 휘발성이 강하다. 입출금 통장에서 쓰고 남는 돈으로 저축할 수 있는 돈이란 없다.
둘째, 자산의 규모를 파악하고 장단기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셋째, 할부 구매를 막는다. 할부 구매는 자산 증식의 적이다. 남편과 나는 우유 한 통을 사든 자동차를 구입하든 현금으로만 계산한다. 3개월 할부 대신 3개월 저축한 후에 현금으로 산다.
넷째, 돈 세는 구멍을 안다. 적은 액수의 지출이라도 기록해 두면 돈 세는 구멍이 보인다. 돈은 큰돈에서 세는 것이 아니다. 액수가 적으면 필요와 상관없이 지출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가 구멍이다.
다섯째, 패턴에서 벗어난 지출을 잡아낼 수 있다. 오랫동안 가계부를 쓰다 보니 지출의 패턴과 규모를 알 수 있다. 패턴에서 벗어난 지출은 금방 눈에 띈다. 과도한 지출이 일회적이었는지, 투자가 아닌 소모적이었는지에 대한 분석이 가능하다.
여섯째, 부부를 하나의 경제팀으로 성장시킨다. 가계부를 쓰며 남편과 함께 돈 관리를 한다. 같이 돈 공부하고 정보를 나누는 남편과 나는 최고의 경제팀이다.
언젠가 '묻지 마 용돈'을 도입한 적이 있었다. 나만의 돈을 갖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 너만의 돈도 쥐여주며 서로 묻지 않기로 했다. 이 항목은 몇 개월 지나 흐지부지 없어져 버렸다. 남편도 나도 묻지 마 용돈을 쓸 데가 없더라는...
자발적 은퇴를 한 지 넉 달이 되어간다. 신혼 초부터 써온 가계부 덕분에 은퇴 후 생활비와 노후 자산을 정교하게 계산해 볼 수 있었다. 가계부를 쓰며 자산관리 훈련을 해온 터라 은퇴 후 살림을 꾸리는 데 별 어려움은 없다.
가계부는 남편과 내가 함께 걸어온 삶의 기록이다. 공동의 추억을 소환하기도 하며 미래의 삶을 준비할 수 있게 한다. 나는 닥치는 삶이 아니라 스스로 결정하는 삶을 살고 싶다. 그래서 오늘도 가계부를 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