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짠단짠의 책읽기
나는 침대에서 스탠드 불빛으로 책을 읽고 있다. 옆에 비스듬히 앉아 독서하는 남편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터지는 웃음을 꾹꾹 누르고 있다. 참던 방귀 쏟아지듯이 결국 웃음이 터지고 만다. 오랜만에 책을 읽으며 크게 웃어본다. 김호연 작가의 소설 ≪망원동 브라더스≫다. 뭐 이런 한숨 나오는 이야기를 몽글몽글 유쾌하게 쓴다니.
하루의 끝자락에 책 읽기는 꿀맛이다. 우리 집 침실에는 TV(어차피 이건 집에 없다), 오디오 같은 전자 기기가 없다. 잠들기 전 책 읽는 즐거움을 만끽하기 위해서다. 스마트폰은 침실 문을 넘지 못한다. 남편과 나의 불문율이다. 스마트폰은 침실 앞 협탁에 무음으로 올려놓는다. 잠들기 전 나는 전자책을 읽고 남편은 종이책을 읽는다.
내게 전자책은 4차 산업혁명에 버금간다. 읽고 싶은 모국어책을 독일에서 당장 읽을 수 있다. 자발적 은퇴 직후, 한 전자 서점에서 월정액 서비스를 신청했다. 한 달에 단돈 5천 원 정도만 내면 읽을 수 있는 전자책이 부지기수다. 월정액 서비스로 제공되지 않는 책들도 더러 있지만 아직은 상관없다. 제공되는 책 읽기도 바쁘다. 푸짐하게 차려놓은 뷔페 같다. 뭐부터 읽을지 행복한 고민에 빠져있다.
어릴 적 우리 집에 책이라곤 성경책과 교과서 빼고 한 질의 위인전뿐이었다. 누군가 엄마에게 강제로 떠넘겼을 위인전 시리즈가 나의 유일한 읽을거리였다. 딱딱한 크림색 겉장이 너덜거릴 정도로 여러 번 읽었는데 기억나는 위인은 유관순과 퀴리 부인뿐이다. 두 양반이 이순신 장군을 물리쳤다.
어릴 적 독서량이 부족해서인지 나이 들수록 책이 고프다. 한국에 갈 때마다 교보문고에 꼭 들른다. 이곳은 학교 다닐 때부터 들락거려서 내게는 고향 같다. 내 껌딱지 언니와 막냇동생을 떼어놓고 종일 서점 안을 들쑤시고 다닌다. 수하물 무게 제한 때문에 무거운 책은 사 올 수 없다. 이 아쉬움은 전자책으로 많이 해결됐다.
전자책을 반기지만 종이책처럼 내 생각을 끄적거릴 수 없어 아쉽다. 전자책 리더에 메모 기능이 있지만 불편해 사용하지 않는다. 나는 종이책을 꽤 지저분하게 읽는다. 읽기 시작하면서 나의 낙서는 시작된다. 앞쪽 속지에 날짜와 읽는 이유를 적는다. 다 읽은 후에는 독서 이유가 충족되었는지 확인하고 내게 말을 건 내용을 속지에 간략하게 써놓는다. 독서 중에 격하게 공감하거나 달리 생각하는 부분을 만나면 책 여백에 빼곡히 내 생각을 적는다.
책 읽기의 즐거움 못지않은 낙서의 즐거움이 전자책에는 없다. 책에 하는 낙서 대안으로 A4용지 한 장에 한 줄 요약과 읽으면서 밑줄 친 부분을 정리해둔다. 이 작업은 완독 후 24시간 내로 한다. 안 그러면 재밌는 놀이가 지겨운 숙제가 된다.
독일 소설이나 에세이에는 손이 가지 않는다. 남편이 소개해주는 종교 서적, 역사책, 시사 잡지는 더러 읽는다. 그 외 내가 읽은 독일어로 된 책들은 죄다 밥벌이에 필요한 것이었다. 그런데도 내가 완독한 두 권의 독일 소설이 있다. 베른하르트 슐링크(Bernhard Schlink)의 ≪Der Vorleser≫-책 읽어주는 남자/김재혁 역/시공사-와 볼프강 프로징거(Wolfgang Prosinger)의 ≪In Rente≫-은퇴/김희상 역/청미출판사-. 독일어의 쫄깃한 식감을 그대로 음미하며 맛나게 읽었다. 원어 책 읽는 즐거움이다. 아쉬운 점은 독일어책에는 낙서를 못 한다. 책에 낙서하고 구기는 것을 남편은 '책에 대한 강간'이라며 질색한다. 이 무서운 단어에 막혀 독일어책은 얌전히 읽는다.
독일에도 몇몇 한국 소설이 번역되어 있다. 남편이 몇 권 사서 읽더니 당최 진도를 빼지 못하고 구석에 치워두었다. 내용은 흥미로운데 번역된 독일어 문체가 밍밍하다나.
‘오 서방님,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어로 읽으시길 권합니다.’
은퇴 후 나를 위한 시간이 많아졌다. 업무에 필요했던 책들은 도나우(Donau) 동네로 이사하면서 싸놓은 그대로 지하실에 있다. 대신 월정액 서비스로 한 상 가득 차려진 전자책들을 놓고 '단짠단짠'의 유혹에 빠져있다. 달달한 음식을 먹고 나면 짭조름한 음식이 당기듯이, 소설을 읽고 나면 투자에 관련된 책을 읽고 싶다. 사회비평 책을 한참 보고 있으면 에세이가 당긴다.
요즘 골라든 책이 김수정 작가의 ≪나는 나와 친하다≫. 글 하나하나가 깔끔하고 세련된 게, 맛깔난 일품요리 같다. 어제부터 짭조름한 책으로 홍성국 작가의 ≪수축사회≫를 읽고 있다. 책 읽기의 단짠단짠에 빠져 행복한 요즘이다.

Bremen/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