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쇼핑이 싫다
나는 쇼핑이 싫다.
예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러하니, 쭈욱 그럴듯하다. 뭘 살지도 모르면서 이 가게 저 가게 기웃거리는 것이 내게는 꽤 피곤한 일이다. 계절이 바뀌면 무슨 옷이 필요한지 파악해서 구매 목록을 작성한다. 목록 작성이 끝나면 아주 큰맘 먹고 주말에 쇼핑하러 나간다. 가장 짧은 동선으로 이동하면서 구매 목록을 지워나간다. 한 가게에서 다 살 수 있으면 횡재한 날이다. 쇼핑은 내게 재미가 아니라 일이다. 그것도 어지간히 하기 싫은 일이다.
나 역시 충동구매를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바지 한 벌 사려고 갔는데 아주 맘에 들면 다른 색상으로 두어 벌 더 산다. 같은 모양인데 색깔만 다르게. 이러면 다음 해까지 바지 살 일이 없다. 편리함 외에 내가 충동구매를 하는 일은 (거의) 없다. 그냥, 갑자기, 홀린 듯 뭔가를 사고 싶은 마음 자체가 생기질 않는다. 충동구매 미끼용인 '지금 사면 30% 절약하는 겁니다.'라는 문구는 '안 사면 100% 절약입니다.'라고 고쳐 읽는다.
내게는 옷을 멋지게 입는 언니와 예쁘게 입는 막냇동생이 있다. 언니는 빈티지 스타일이다. 언니의 패션 취향은 내게 꽤 난해하다. 막냇동생은 영국풍 꽃무늬 옷을 즐겨 입는다. 꽃무늬 좋아하는 건 엄마 닮았다. 나는 바지 입혀놓은 마네킹 스타일이다. 뭘 사야 할지 모르겠으면 마네킹에 입혀 놓은 옷을 사라고 언니가 귀띔해준 덕분이다. 깔맞춤하러 굳이 이것저것 입어볼 필요 없는 최고의 조언이다.
한국에 가면 간지나게 입는 언니와 예쁘게 입는 막냇동생이 나의 마네킹 스타일에 딴죽을 건다. 옷 사는 것을 봐주겠다며 불러내서 백화점 안의 옷 가게는 모조리 돌아다닌다. 내게 이것저것 입혀보지만 나는 귀찮다. 호응 없는 나를 타박하던 둘은 어느새 찰떡궁합이 되어 매장 파티션을 번갈아 들락거린다. 나는 슬그머니 빠져나와 푸드 코너에서 그간 못 먹었던 맛난 것들을 먹으며 오랫동안 두 여자를 기다린다.
사실 평일 낮의 쇼핑은 나의 오랜 로망 중 하나였다. 남들 일하는 볕 좋은 오전에 구매 목록 따위 없이 발길 닿는 대로 여유롭게 쇼핑이라는 것을 하고 싶었다. 자발적 은퇴로 드디어 오래된 로망을 실현할 기회가 생겼다. 도나우(Donau) 동네로 이사한 후 어느 평일 오전에 산뜻하게 차려입고 집을 나서며 재택근무 중인 남편에게 말했다.
"나 오늘 쇼핑하러 나가. 엄청 많이 살 거고 늦게 올 거야."
안 하던 짓에 남편이 반색하며 응원해줬다.
"잘 생각했어. 맛있는 거 먹고 즐거운 쇼핑하고 와."
봄 햇살에 반짝이는 도나우강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시내로 들어섰다. 느린 시선으로 여유롭게 두어 개 옷가게를 들르고 나오니 내 손에는 마네킹에 입혀놓은 (사이즈 넉넉한) 블라우스와 니트가 담긴 쇼핑백이 들려있었다. 이럴 거면서 매장은 왜 둘러봤을까...
손에 들고 다니는 것을 꺼려하는 나는 새 옷들을 배낭에 욱여넣었다. 호기롭게 떠났던 쇼핑 사냥이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시계를 보니 점심 먹으려면 아직도 멀었다. 가져온 캐논 DSLR 카메라를 꺼내 알록달록한 시내를 찍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걸까. 시내 한복판에 있는 첨탑에서 12시를 알리는 종소리가 퍼져나갔다. 점심 먹을 시간이다. 맛집이라는 그리스 식당에서 밥을 먹고 나오니 1시가 조금 지나있었다. 오늘 쇼핑은 여기까지.
나는 시내의 한 베이커리에서 남편과 먹을 케이크를 사서 집으로 향했다. 양손 가득한 쇼핑백과 늦은 귀가를 생각했던 남편은 달랑 케이크만 들고 서 있는 내 모습에 헛웃음을 날렸다.
그날 나는 분명히 깨달았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쇼핑을 못 했던 것이 아니라 안 했다는 것을. 원래 나는 쇼핑을 싫어한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