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의 용도
나는 머리가 복잡하면 달력 한 장을 뜯어낸다. 달력은 크면 클수록 좋다. 뒤죽박죽 엉켜있는 생각을 단어 혹은 단문으로 텅 빈 달력 뒷면에 하나씩 끄집어낸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떠오르는 대로 적는다. 색연필, 사인펜, 북 마커가 총동원된다. 머릿속에서 꺼낸 순서가 아닌, 같이 묶을 수 있는 덩어리로 적다 보면 하얀 달력 위에는 자석에 붙은 쇳가루 모양들이 생겨난다. 이렇게 내 생각을 형체로 마주한다. 분류화 작업의 어려움은 포스트잇으로 보완한다. 작업이 끝나면 벽에 붙여놓고 나와 소통한다. 생각 묶음을 하나씩 들여다보며, 하지 말 것들을 솎아내고 해야 할 일에 집중한다.
회사에서는 마인드맵(Mindmap)을 사용했지만, 내 머릿속을 쏟아놓는 데는 달력을 이용한 아날로그 방식을 선호한다. 텅 빈 백지가 주는 설렘과 안온함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재밌다.
달력 뒷면에 끄적거리는 것은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해오던 일이다. 나는 고3 때 밤새워 공부한 기억이 없다. '4시간 자면 붙고, 5시간 자면 떨어진다.'는 4당 5락과는 거리가 먼 입시 공부를 했다. 나는 잠을 줄여가며 공부하지 않았다. 학원 수업도 과외 역시 받지 않았다. 내가 택한 공부 방식은 간단했다. 수업이 끝나면 쉬는 시간에 배운 내용을 빠르게 되새겼다. 쉬는 시간 10분은, 금방 배운 내용 복습하고 군것질하거나 도시락을 흡입한 후 화장실까지 다녀오는 것을 가능케 했다! 점심시간에는 책상에 엎드려 잠을 잤다. 그러면 오후 수업에 잠과 사투를 벌이지 않아도 됐다. 자율학습 시간에는 그날 배운 내용을 복습한 후 책과 노트를 덮고 A4 종이에 공부한 내용을 옮겨 적었다. 그리고 2주에 한 번꼴로 머릿속에 넣어둔 내용을 A4보다 더 큰 종이, 바로 달력 뒷면에 쏟아냈다. 기억이 가물거리는 부분만 다시 복습하는 식이었다. 이 학습법은 내게 잘 맞았다. 굳이 밤늦게까지 공부할 필요가 없었다. 지금도 나는 대학 합격의 8할은 달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달력과의 인연은 더 오래됐다. 지금은 집에 굳이 달력이 필요하지 않지만 옛날에는 집마다 흔했다. 어릴 적 아버지는 철 지난 달력으로 자식들의 책을 일일이 싸주셨다. 하루의 노동을 마친 아버지가 번들거리는 하얀 달력 뒷면으로 새 학기 교과서를 싸주시던 모습을 나는 또렷이 기억한다. 그 기억 속에는 초등학생인 어린 내가 책 싸는 아버지 옆에 앉아있다. 아이는 아버지가 사각사각 가위질하며 스카치테이프 없이 노련한 솜씨로 책 귀퉁이를 마무리하는 모습을 기대에 부풀어 지켜본다. 인간 극장의 한 장면 같다.
달력으로 교과서 겉장을 싸는 일은 어린 내게 새 학기의 시작을 의미했다. 고3 때의 달력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은 '기적의 암기법'을 가능케 했다. 어른이 되어서는 뒤엉켜있던 생각 타래를 청실홍실로 풀어 무늬도 곱게 엮는 데 쓰이고 있다. 이쯤 되면 달력의 진짜 용도가 뭔지 헷갈릴 지경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