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의 축제
학생 때는 넉넉지 않은 주머니 사정 때문에, 직장 생활을 할 때는 시간이 여의찮아 한국에 자주 가지 못했다. 은퇴한 지금은 코로나로 묶여 옴짝달싹 할 수 없다. 참 얄궂다.
2~3년에 한 번꼴로 한국에 갈 때면 소풍날 받아놓은 아이처럼 들떠있었다. 인천 공항에서 짐을 찾아 게이트를 나서면 목을 길게 빼고 기다리던 가족들이 반가움 가득 우르르 다가왔다. 30년 동안 한결같은 풍경이다. 엄마가 늘 먼저 나를 알아보셨다.
"딸~"
공항에 있는 수많은 딸 중에 엄마 딸인 나는 단번에 그 부름을 알아챘다. 어딘가에 앉아계셨던 아버지가 서둘러 오셔서 나를 꼭 안아주셨다. 족히 한 시간은 기다리셨으리라. 시간이 되면 언니, 남동생, 막냇동생이 부모님과 함께 나를 맞았다. 11시간 장거리 비행과 그전에 이미 3시간 넘게 프랑크푸르트 공항행 기차를 탔던 터라 몸은 지쳐있었지만 이보다 더 행복할 수 없는 순간이었다. 한국에 갈 때마다 부모님의 주름은 안 뵌 세월만큼 늘어났고, 형제들 머리털도 희끗희끗해져 갔다.
이제는 무릎 연골이 다 닳아 더는 공항에 나오지 못하시고 집 앞에서 나를 배웅하시는 엄마. 아직 짱짱해서 당신의 차로 딸내미 공항에 데려다줄 수 있다고 고집 피우시는 아버지. 몇 해 전부터 연로하신 부모님 대신 언니나 남동생이 나를 인천 공항에 데려다줬다. 공항버스 타고 가겠다고 말 꺼냈다가 본전도 못 찾았다.
"이제는 우리가 데려다줄게."
막냇동생은 도시락 가방을 들고 늘 공항으로 배웅 나왔다. 매번 새벽에 일어나 김밥을 싸고 내가 좋아하는 찹쌀 도넛 두 개까지 챙겨 오며 잔소리도 잊지 않았다.
"촌스럽게 기내 음식을 왜 못 먹어! 다음에 올 때 김밥 통 꼭 가지고 와."
한국에 가면 보통 3주 정도 머물렀다. 그 이상 휴가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업무 일정이 빡빡한 남편과 같이 한국에 갈 참에는 그나마 2주밖에 시간이 없었다. 내가 있는 동안 부모님 집은 잔칫집이었다. 시차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기가 힘들었지만 부모님과 한 상에 둘러앉아 먹는 밥을 어찌 포기할 수 있겠는가. 엄마의 찰진 도맛소리와 밥솥 추 딸랑거리는 소리는 독일의 고즈넉한 마을에 울려 퍼지는 교회 종소리 같았다.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가족과 보냈다. 주부인 언니와 막냇동생을 하루걸러 한 번꼴로 만나 놀면서 다음 놀거리를 궁리했다. 모처럼 서울에 나가 늦어지면 남동생 집에서 신세를 졌다. 조카들도 함께 온 가족이 2박 3일 여행을 떠나곤 했는데, 지난번 여행에서는 4세대가 함께 축구를 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내게 넘치게 후하고 더 못 해줘서 안달인 형제들이 나는 마음에 걸렸다. 나의 한국 방문 때마다 형제들의 지출이 만만치 않아 문득문득 마음이 무거웠다. 전라도 처가로 장가와서 이제는 장모님이 해주시는 푹 삭은 홍어찜을 나보다 더 잘 먹는 경상도 제부에게 나의 염려를 살짝 내비쳤더니 이런 고마운 말을 했다.
"저희도 각자 사는 게 바빠 실은 이렇게 자주 못 만나요. 처형이 오시면 덕분에 이렇게 만나요. 하루하루가 축제예요."
나의 방문을 축제라고 말해주던 제부. 기내 음식 못 먹는 나를 위해 새벽부터 도시락을 싸는 막냇동생. 내가 있는 동안 통째로 시간을 비워 껌딱지 하는 언니. 나한테 정신 팔린 언니 때문에 자주 혼밥 하던 형부. 남편에게 치맥의 신세계를 맛보게 해준 남동생. 출국 전날 독일 가서 먹으라며 형형색색 밑반찬 만들어 늦은 밤에 파주까지 먼 길 오는 올케. 나 도착하는 날 벌써 돌아갈 날 세워보며 눈물짓는 엄마 그리고 딸내미 다음에 또 볼 수 있으려나 아련히 바라보시는 아버지.
이 소중한 가족을 못 본 지 어느새 30개월이 지나고 있다. 부모님은 그사이 또 얼마나 작아지셨으려나. 나를 '독일 할머니'라고 부르는 언니의 손자 녀석은 아가에서 형아가 돼있겠다. 코로나 염병이 잠잠해져 나라 간의 빗장이 풀리면 우리들의 축제가 곧 다시 시작되겠지. 인천 공항 게이트에서 "딸~" 하고 부르는 엄마 목소리가 무척이나 그리운 오늘이다.

Cuxhaven/German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