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도자의 중요성
나의 시아버지 칼린은 2차 세계 대전 때 나치 독일군이었다.
아내를 위해 부엌 창 앞에 빽빽이 장미를 심고 여기저기 후원을 아끼지 않는 평범한 할아버지 칼린이 영화에서 봤던, 피 한 방울도 나지 않을 듯한 나치 군인이었다니! 나는 칼린이 나치 정권 때 군인으로 어디에서 뭘 하고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조심스레 묻자 칼린은 어제 일처럼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1925년 12월생인 그는 1943년 열일곱의 나이로 나치 정권에 징집됐다. 말 그대로 징집은 그의 선택 사항이 아니었다. 어린 나이에 전쟁터로 배정된 곳은 프랑스 서쪽에 위치한 항구도시 라로셸(La Rocelle)이었다. 그곳에서 패전 후 포로가 될 때까지 통신병으로 지냈다.
"자대 배치는 오로지 손가락에 달렸었지. 줄을 쭉 세워 놓고 너는 러시아, 너는 프랑스, 이런 식이었어. 러시아로 갔었다면 살아서 못 돌아왔을 거야."라며 눈물 글썽이던 칼린.
라로셸은 칼린이 자대 배치받던 당시 나치 독일의 점령지였다. 항구에 독일군의 잠수함 기지가 있어서 몇 차례 연합군의 공중 공격을 받았지만, 마을 사람들과는 별 마찰 없이 지냈다.
1945년 봄, 칼린의 부대에는 패전 분위기와 불투명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팽배해 있었다. 불안한 날들을 보내던 중, 모든 병사는 무기를 내려놓고 손을 머리 위로 올린 채 집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1945년 5월 9일이었다. 나치 정권은 투항하지 말고 끝까지 싸우라고 했지만, 칼린의 독일군 사령관 에른스트 쉬르리츠(Ernst Schirlitz)는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독일군은 라로셸시와 항구를 파괴하지 않고 프랑스군에게 넘겨주고, 프랑스군은 패전한 독일군을 공격하지 않겠다는 조건으로 두 나라의 군사령관들이 물밑 교섭을 벌였다. 그 성과로, 칼린을 포함한 독일군들은 의미 없는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이러한 평화적 합의가 없었던 프랑스 남부의 해안도시 후와양(Royan)은 1945년 4월 교전에 의해 쑥대밭이 되었다. 만약 칼린의 군사령관이 평화적 양도라는 선택을 하지 않았다면 라로셸은 후와양처럼 파괴되었을 테고, 민간인 피해 역시 적지 않았을 것이다. 칼린 또한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북한의 핵 위협과 어느 대통령 후보의 대북 선제타격 논란을 보며 수년 전에 들었던 칼린의 이야기를 떠올린다. 지도자는 에른스트 쉬르리츠처럼 수백 수천의 생명을 살리기도 하고, 후와양의 독일 사령관처럼 부하들을 죽음으로 내몰기도 한다. 전작권 없이 선제타격이 가능한지 묻기도 전에 전쟁에 대한 공포가 스며든다. 제아무리 정밀한 선제타격이라고 해도 전쟁이다. 전쟁은 파멸이며 국민은 비참하다.

Cuxhaven/Germany